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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넘나드는 특유의 시 세계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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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넘나드는 특유의 시 세계 펼쳐
  • 전상진 기자
  • 승인 2013.08.27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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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유산을 찾아서 <32>/ 내포의 문화예술인·문학<4> 신석초 上

충남도는 지난 4일 충남지역 출신 문화예술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활용하기 위해 ‘충남을 빛낸 문화예술인’을 선정했다.

이번 선정은 1900년 이후 충남에서 태어나거나 도내에서 10년 안팎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했다. 충남을 빛낸 문화예술인은 문학, 국악, 음악, 무용, 연극, 연예, 미술, 사진 등 모두 8개 분야에 걸쳐 100명이 선정됐다.

이에 본지에서는 내포지역 문화예술인들에 대해 내포문화권에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 및 연구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길 바라며 내포지역 문화예술인들을 집중 조명하기로 했다.

 
서천 출생…동양적 심미성과 서양적 엄격성 추구

“신석초 시인의 선비다움이나 시인다움은 철저하게 세속적 이해를 벗어난 점에서 빼어난 본보기가 되었다”며 “세속과는 거리가 먼 듯한 깊숙한 눈에 특유의 회갈색 눈빛, 그리고 더없이 날카롭게 꺾어진 콧등은 사물이나 사리를 대할 때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매부리코로 어쩌면 고고하고 초연하기 이를 데 없는 품이었다”고 후배 시인 성춘복은 신석초 시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특유의 시 세계 펼친 신석초(申石艸, 1909~1975) 시인은 본명은 신응식(申應植)이다. 필명은 유인(唯仁)이라고 썼으며, 호는 석초(石艸) 또는 석초(石初)이다. 아버지는 신긍우(申肯雨)이다.

그는 충남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출신으로,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해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신병으로 중퇴했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뒀으며,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카프·KAPF)의 맹원으로 활약했다.

이 무렵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 특히 발레리에 크게 심취했으며, 1935년에는 <신조선>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3년 뒤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했다. 그 뒤 1960년 예술원 회원,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5부터 1년 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신석초 시인의 문단 활동은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김광균·윤곤강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37년 ‘호접’, ‘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했고, 이어 1939년 <시학>지에 ‘파초(1호)’, ‘가야금(2호’, ‘묘(4호)’ 등을 발표했다.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했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했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했다.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 신석초 시인의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생가터.
비교적 적은 작품 발표 … 고전시가 운율 담은 ‘바라춤’ 대표작

신석초 시인은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해 왔으며, 이러한 작품 세계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특히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두보, 나아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곧,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 달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우리 정신이 어떠한 물질성 및 기계성도 극복할 수 있다는 순수한 이상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현실적 집착을 떨쳐버리는 초극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고 있으며, 동일성을 지향하는 변증법적 통합체를 강조하고 있다는 데 시사적 의의가 있다.

▲ 서천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신석초 시비.
그는 다른 시인들에 비해 적은 수의 작품을 발표했고, 그의 작품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라춤’에는 불교적 사상이 바로 불교적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여전히 발레리적 엄밀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청산별곡(靑山別曲)’을 비롯한 고전시가의 운율을 대담하게 원용하고 있다. ‘바라춤 서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묻히리란다. 청산(靑山)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이 없어라./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無垢)한/ 꽃이언만/ 깊은 절속에, 덧없이 시들어 지느니/ 생각하면 갈갈이 찢어지는 내맘/ 서러 어찌하리라// (6연 42행 생략) 몸아! 맨몸아! 푸른 내몸아!/ 마(魔)의 수풀을 가노라/ 단꿈은 끝없는 즐 김을 좇아/ 꽃잎 져 흐르는 여울을 가노라/ 바다로 여는 강물을 뉘라 그지리오/ 어느 뉘라 그지리오// (2연 12행 생략)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이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여라/ 지새여 듣는 법고(法鼓)소리!/ 이제야 난굳세게 살리라/ 날 이끄을 흰 백합의 손도, 바람도/ 아무것도 내몸을 꺾을이 없어라”

▲ 신석초 시인 생가터 표석.
탄생 100주년 맞아 시비 건립

신석초 시인은 1975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葬地)는 경기도 양주읍 장흥면 신세계공원 묘원이었으나 후에 충남 서천으로 이장됐다. 지난 2000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한산모시관 서편 잔디광장에 시비에 세워졌다.

특히 신석초 시인의 ‘꽃잎 절구’가 새겨진 시비는 서천 문인들이 중심이 된 신석초선생시비건립추진위원회와 서천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시비를 건립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건립추진위는 한국문인협회 대전지회, 지역문인 동우회인 ‘서림문학동인회’를 통해 시비 건립의 뜻을 널리 알렸고, 초등학생부터 주부독서회 등 500여 개인 단체가 성금을 보탰다. 당초 목표 3000만 원을 훨씬 넘어 4000만 원 가까이 모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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