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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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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27
  • 우흥식 기자
  • 승인 2007.07.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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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요약 - 일본인은 부산에 상륙해 고덕사라는 명칭의 사찰을 만들고 정노진종을 재건해 보려고 했으나 침략자의 종교를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백제의 고도를 보려고 부여에 왔다가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와 모두들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상길은 애쓴 보람이 있어 다랑논으로 칠 홉 마지기의 논을 떠 모를 꽂았다. 길동도 이제는 숲 속 생활에 차츰 익숙해졌다. 고비, 네가래, 산자고, 참비비추, 용둥굴레, 얼레지, 개감채, 산부추, 부들, 조팝나물, 쇠서나물, 보리뺑이, 절굿대, 각시취, 톱풀, 곰취, 솜방망이, 떡쑥, 초롱꽃잔대, 금마타리, 송이풀, 기린초, 가지괭이, 눈박주가리, 어수리 등 우용과 이런 나물을 따서 삼아 말리거나 녹말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갑쇠도 마침내 어설프게 낫과 호미를 만들고 찌그러진 모양이나마 질그릇도 구워 내기 시작했다.
길동의 만수산 식구는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같이 모여서 도울 뿐 아니라, 아흐레에 한 번씩 모임도 가졌다. 그것을 아흐레 모임이라고 하였는데, 사람 수가 아홉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었다.
아흐레 모임에서는 무량사의 저녁 범종 소리에 맞추어 서로 두손을 합장해 염불을 외고, 두 줄로 서서 맞절을 한 뒤,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하였다. 모임을 마치면 모두 앉은 자리를 치우고 서로 맞절을 한 뒤 그 밤 안으로 조용히 헤어졌다.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공부도 하였다. 농사법, 건강법, 호신술, 불경, 한자, 역사 이야기, 피리 연주 등이었는데,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었다. 토론도 하였다. 몇 사람은 일본말 공부를 했다. 고쇼와 슈케이를 위해 시관이 조선말을 가르치기를 맡기도 했다.
길동이 고쇼와 슈케이를 만난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고쇼도 차츰 상처가 아물고 기운을 차렸다. 원효며 사내정에 대해 한자를 써 가며 묻고 대답하던 시기도 지나고, 이제는 교쇼 형제도 산속의 식구로 자연스럽게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아흐레 모임은 아홉 군데 귀틀집을 차례로 돌며 하는데 모두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불목한도 어쩌다 아흐레 모임에 잠깐 다녀가기도 하였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던 슈케이는 뜻밖에도 요리를 잘했다. 불목한이 약초를 팔아 돈을 만들면 슈케이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소금뿐만 아니라 기름까지 사 와서는 여러 가지 나물을 튀기고 볶아서 맛을 내곤 하다 보니 자연히 슈케이가 음식을 돌리는 일이 잦게 되고, 또 오임도 요리를 만드는 회정골에서 열리는 일이 제 차례보다 많았다.
“아따, 슈케이는 음식 솜씨가 좋아 장가 들 일 없겠네유.”
우용이가 말하자 모두 찬동하였다.
슈케이는 철따라 피는 들꽃을 꺾어 방안을 환하게 하기도 하였다.
“맨 들꽃인데 왜 꺾어다가 죽이나. 먹을 거나 되나. 별 성미 다 보겠네유.”
상길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에 찬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름 저녁 아흐레 모임이 끝나 각자 자기 처소로 돌아갈 때면 낮에 숲 속의 나무 구멍 속에 자던 소쩍새가 ‘소쩍 소쩍 소쩍쩍쩍’ 하고, 수리부엉이가 바위나 나무 위에 꼿꼿이 앉아 큰 눈을 뜨고 ‘푸호 푸호' 하고 울어 밤길의 동무가 되어 주었다.
“소쩍새가 왜 소쩍 소쩍 우는지 알아?”
윤성이 물었다.
“몰라, 왜 그러는데.”
“어린 시절 생각이 그리워 소시쩍(少時때) 소시쩍(少時때) 하는 거야.”
“그럼 부엉이는 왜 푸허 푸허 하는지 알아?”
“무슨 소리하려고?”
이번에 원초가 말했다.
“세상사 다 부허(浮虛)하다는 거야. 부호(富豪)도 다 부허(浮虛) 하고.”
“새들도 문자 쓰는구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고쇼 대신 슈케이는 동작이 민첩해 우선 불목한과 연락도 거들었다. 산속에서 구할 수 없는 소금을 구하고 약초를 팔려면 불목한과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노랑기가 꽂혀 있으면 슈케이가 내려가 산신각 마루 밑에 물건과 편지를 숨겨 놓고 불목한이 숨겨 논 물건이나 편지를 가지고 길동에게 왔다.
하지가 되어 한낮에 햇빛이 지글거릴 때쯤 시관의 밭에서 감가를 캤다. 거름이 적어 솔방울만 했지만 모두 구워 껍질까지 먹었다. 입들이 서커멓게 되었다. 몇 개밖에 안 돌아갔지만 감자떡도 해 먹었다. 우용은 요긴한 식량인 산마를 7월부터 캐기 시작하였다. 버섯도 나왔다. 봄에 해 놓은 벌꿀에 재운 산채 음료도 마셨다. 밭과 논에는 산짐승이 극성을 부렸으나 그래도 끝물은 남아 있었다. 모두 일을 나누어 하고 필요할 때 힘을 합쳐서 하니까 시간이 남아서 하루 몇 시간만 일할 때가 많았다.
일본 사람과는 서로 말을 배워 겨우 의사소통이 되었다. 원초는 어지간히 의사가 통하였다. 상길은 자기도 일본어를 못하면서 발음을 고쳐 준답시고 “아니 하무니다가 뭐야 우자를 빼면 되잖아. 다시 해봐요. 자, 하무니다.” 하고 자기도 틀려 버려 모두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고쇼의 건강은 나날이 회복되어 갔다. 말하지 않았지만 고쇼는 부여 근처에서 농민이 날카로운 칼과 낫으로 공격하여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상처도 아물며 새살이 돋아나서 조금씩 거동도 하게 되었다.
고쇼는 아침에 일어나 산의 영기를 맡고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것이 몸과 마음에 좋다고 하였다. 눈을 감고 있으면 새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물소리가 모두 들린다고 하였다.
또 몸을 주무르고 나무 막대기로 발바닥을 누르는 건강법도 알려 주었다. 솔잎차며 솔잎을 썰어 헝겊에 넣어 목욕을 하는 효능도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들은 옹기 항아리에 물을 붓고 불을 때어 여름에도 더운물로 목욕을 하여 그들이 사는 굴은 온천암이란 별칭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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