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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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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25
  • 우흥식 기자
  • 승인 2007.06.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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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25
지난호 요약 - 길동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자 눈앞에 있는 바닥에 불경이 쓰여 있는 것을 보였다. 이에 길동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군임을 알 수 있었다. 불경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된 길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데….

나아가 그는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했고 정토종의 근본 사상은 이미 400년 전 통일 실라 시대 원효(元曉)가 대성한 것’ 이라고 극도의 존경으로 말했을 때 백제의 조상들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호넹은 정토란 말에 대한 시비가 일본에서 붙었을 때도 오직 “저 유명한 유효가 정토란 범부를 위하고 성인을 위한 것이라고 그 저서에도 나와 있지 않소?” 하고 한마디를 했더니 모두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분의 삶은 고달프겠지만 원효 같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선인을 배출한 신라에 대한 원한을 불교의 일심 사상으로 승화하여 앞으로 삼국을 어우르는 훌륭한 정신문화를 함께 이루어 가자.”고 진심으로 말해 주어 우리는 마음 깊이 감동했습니다.
호넹 뒤에는 신란, 그리고 그 뒤에 렌뇨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백제 마을이 있는 세쓰 지방에 불교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오사카는 전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거기에 렌뇨는 석산 혼간지라는 작은 절을 지었습니다. 그는 염불이 중요하지 않은 절은 크게 지을 것 없다, 보통 집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절 주변에 신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차츰 같이 염불을 외는 형제 곧 어동붕이 모였는데 그들 간에는 무사도 영주도 가난한 농민이었습니다. 많은 백제 후손도 모두 형제라는 사상에 공감하여 원한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이 절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덧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오사카에 점점 신도들이 모이고 커져 절의 도시 즉 사내정이 되었고, 점차 그 도시는 사상과 예술과 교역과 정보의 도시로 자랐습니다. 거기서는 서로 대적하던 이도 여기 오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왕래하였습니다. 또 마음에 신심(信心)을 품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생업에 종사해도 좋다고 하여 상인도 목수도 떳떳이 자기 일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사내정에서는 자치 단위로 총촌(摠村)이 있고 그 속에 전문 직업별로 강(講)이라는 조직이 생겼습니다. 강은 정기적으로 모여 신심을 깊게 하고 상하 남녀 신분 구분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업의 향상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들은 같이 식사도 하고 문화생활도 즐겼습니다. 이런 강은 요원의 불꽃같이 번졌습니다. 상인들은 회합중(會合衆)이라는 지도 기관을 만들어 자치를 했습니다. 자검단(自檢團)이라 하여 경찰권도 도시가 가졌습니다. 주변에는 농장이 생겨 농민들은 절에서 자기 밭에 나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내정은 오사카뿐 아니라 동해와 북륙(北陸)의 니아가다 이시가와 후꾸이 히로시마와 규슈 등 다이묘가 지배하는 경계를 넘어 하나의 종교 도시와 영토가 전국 곳곳에 생겼습니다. 그들은 도 중국, 조선, 남만제국과 통상을 하여 이윤과 부귀를 모았습니다. 같은 사내정 간에는 종교적 유대감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힘만을 의지하는 타력종에서 가장 눈에 띄는 평등과 질서, 활기와 인정이 넘치는 위대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와 그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손아귀에 넣으려 혼간지를 공격했습니다. 종교와 자치의 혼간지는 10년 이상 저항했으나 군사력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백 년을 채 채우지 못한 것입니다.
도요토미는 권력을 잡더니 혼간지를 강제로 부셔 버렸습니다. 사찰은 3일 밤낮을 타고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오사카 사내정 주민까지 동원하여 오사카 성을 세웠습니다. 오사카 성 안에는 그곳이 혼간지 자리임을 표시하느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이 새겨진 작은 돌 하나만 남겼습니다. 정토종 신도들은 성을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그 돌 앞을 오가며 돌을 몰래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문화의 나라는 사라지고 그 잘에 군인과 무력의 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군인들은 교역과 유통 기능만을 남기고 다른 것은 다 탄압하였습니다. 천하는 통일하는 데도 경제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사카 성에 흩어진 주민은 살아가기 위해 다시 모여 이제는 상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의 신심은 정적과 신용 있는 상업의 토대가 되어 오사카는 거대한 상업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제는 이제 문화와 자치가 아니라 군인들의 천하 통일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으로 뼏쳤던 것입니다.
일본이 군인 세상이 되면서 중국, 조선, 일본 세 나라도 문화와 교역이 아닌 전쟁과 침략의 관계로 변했습니다. 비록 강제 동원된 것이기는 하나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이번 전쟁 참가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정말 그것은 민중의 소원이 아닙니다. 도요토미는 일본 민중뿐 아니라 조선을 포함한 동양의 민중을 괴롭히고 역사를 거스른 자입니다. 전에는 중국과 조선, 일본은 서로 오가며 같은 문화권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동양의 문화와 평화가 지속하고 재현되기를 바랐지만,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치하면서 그 꿈은 짓밟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사카에서 군인으로 동원되어 규슈 히젠의 요비코로 왔습니다. 상관은 오사카 사카이의 상인 출신 고니시 유키나가 영주였습니다. 요비코 만에는 가부도가 누워 있어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막고, 항구 안에는 물이 깊어 많은 배가 닻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육지는 기복이 있는 언덕인데, 전국 160여 개 지역에서 온 영주들이 진을 치고 진영을 급히 만들었더군요.
요비코에서 보면 푸른 바다 저 멀리 조선 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생각하고 들뜬 군인도 있었고, 두고 온 가족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군인도 있었지만 나는 아득한 백제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원효의 위대한 사상이 숨쉬고 있을 어떤 현자이 줄 감동과 기대를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 상륙하자 나는 고니시와 상의했습니다. ‘여기 상륙한 뒤 현지인과 무역을 해야 하는데 반감이 많을 것이다. 반감을 완화하려면 불교로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니시는 재빨리 말귀를 알아들었습니다. 고니시는 원래 어거스틴이란 세레명을 받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부산에는 길 양쪽에 노렌(상호명을 써서 늘어뜨린 막)을 내건 일본 사카이의 상인도 있고 감색 바탕에 힌 글씨로 이다미야니 오사카야니 새겨 넣은 상점도 보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술과 이부자리, 찻그릇 등을 팔았지만 여자나 노예 거래, 노획물의 감정 등 전쟁으로 한몫 보려는 못된 장사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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