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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이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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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이 눈앞에 펼쳐진다
  • 한관우 기자
  • 승인 2007.06.0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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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이 개척의 보습을 박은 곳, 흑룡강성

중국 해림시 현지취재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눈앞에 들어오는 모습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옥토다. 이곳의 조선족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고 땅의 주인노릇을 위해 농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시야를 다잡지 못하는 광활한 대지는 그야말로 조선인의 이민사를 다 쓰고서도 남을 만큼 넓었다. 이곳에서 이종건 홍성군수 일행의 방문은 우리민족이 개척의 첫 보습을 박은 곳, 해림시 정부에게는 단연 화두였다. 대한민국 지방정부수장의 교류를 위한 첫 방문이라는 조사원 해림시장의 고백은 우리민족의 피가 흐르고 그러면서도 중국공민임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조선족의 소외를 호소하는 듯 했다.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한 조선족

특히 조선족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동포에게도 버림과 멸시를 당하는 수모의 삶을 살게 되니 고국 땅에서도 ‘멸시와 홀대’의 피곤함은 100여 년간 쌓인 문화의 이질성일까, 동포애마저도 무색해지는 아픈 역사였다. 해림시의 농업은 조선민족의 농경문화의 본류라는 비옥한 땅에 유기농업과 친환경농업을 하는 민족공동체와 비옥한 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민족성이 있었기에 지금은 조선족집중촌 건설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발전공간의 이면에는 조선민족의 아프고 쓰라린 사연을 담고 있었다.


이곳 조선족의 역사는 1910년대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점당한 후 일제의 약탈로 80%이상의 농가가 파산을 겪으면서 1919년 3․1운동이 실패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피난길에 올라 길림과 요녕,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흑룡강에 정착했다. 이후 1930년대에는 흑룡강의 조선족이 4만5000명에 달했고,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기까지 일제의 강제 이민정책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 정착한다. 1940년대에는 15만3000명, 1980년대에는 43만 명, 1990년대에는 45만 명, 2000년대에는 38만 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25만 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조선족에게는 한국은 모국으로 통한다. 이제 한국과 중국의 직접관계가 시작된 지 10년을 맞이한 조선족에게는 한국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민족, 핏줄로서 정당한 관계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과정을 통한 역사적, 교육․문화적 차이와 체제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충돌은 분명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신합촌 건설, 새로운 변화 ‘모태’

해림시 신합촌 건설의 중심에는 이동춘 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85년 30살의 젊은 나이에 당서기에 부임하면서 마을을 하나의 집단기업으로 경영해 조선족집중촌의 최초모델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해림시 조선족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신합촌(新合村)도 지난 10년 동안 급속한 해체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570호 2376명의 호구등록자 중에서 840명이 한국에 나갔고, 200명은 대도시로 나가 한 집에서 한 명 이상이 외지로 나갔다고 한다. 특히 노동력을 중심으로 한다면 80%는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합촌은 활기가 있어 보였다.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토지개혁과 백두산집체기업의 설립, 친환경 유기농업인 오리농법의 성공, 음식문화관광지로의 변신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땅은 실 가격으로 양도하도록 해 촌민위원회 감독 하에 반드시 신합촌이나 촌민위원회에 팔도록 해 소규모 영농을 대규모로 확대한 점이다. 경제성이 발생했고, 농사짓기가 어려운 땅은 과감하게 사업이나 공업용지로 전환했으며, 촌민들이 공동으로 만든 백두산기업은 농기구, 무역, 부동산 개발 등에서 사업을 펼치며 조선족이 모여살 수 있는 아파트건설로 집단거주 지역을 형성했다. 신합촌은 한국에 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것에 대비해 주거환경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자체적으로 3년 동안 10동의 아파트를 짓고 500가정을 입주시켰다. 또한 대규모 상업관광단지를 조성 중에 있다.


오리농법 성공으로 일대 혁신

한편 신합촌은 유기농업인 오리농법의 성공으로 일대 혁신을 일으킨 곳이다. 홍동면 문당리의 오리농법이 그대로 전수돼  관광농업의 메카로 부상했다. 전수자도 홍동환경농업마을 대표인 주형로 씨가 주인공이다. 지난 2001년 한국의 협동조합에 관한 연수차 주 씨를 만난 신합촌의 문태인 총서기가 2002년 주 씨가 대표로 있는 문당리 환경농업마을을 직접 방문해 오리농법을 전수받아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오리농법 벼를 재배했다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경험부족으로 족제비가 나타나고 오리가 벼를 먹고 풀이 자라나는 등 마음고생도 심했지만 현지에 맞는 오리농법으로 개조해 최종수확에서는 생산량도 증가(일반 벼보다 한 무에 200근)했고 가격도 일반 쌀에 비해 최고 7배 이상 비싸게(한 근에 5원)받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합촌은 유기농업인 대규모 오리농법을 보급하여 관광을 결합한 대규모 친환경마을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또한 농업뿐만 아니라 축산분야에서도 사료재배 등 무한한 공간에 다양한 가능성이 보여 한국의 축산제일군인 홍성군과는 상호 협력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공감대와 협력여건을 찾으면 장기적으로 소득을 포함한 가치와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공존공영의 충분한 우호적 발전기반이 잠재된 곳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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