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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에 놀아난 이응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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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에 놀아난 이응노미술관
  • 한관우 기자
  • 승인 2007.05.10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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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이응노미술관, 고암 출생지 잘못 표기
"이응노의 1904년 1월 12일 홍주군 홍천면 중리 386번지

출생 기록 지번은 현재의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 생가지"

 

"예산군이 고암 출생지로 주장하는 덕산면 낙상리 24번지는

본래 홍주군 땅,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처음 생긴 지명"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출신의 세계적인 한국화의 거장 고암 이응노 화백(1904~89)의 출생지를 놓고 최근 홍성군과 예산군, 대전의 이응노미술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결정적인 근거가 제시됐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3일 대전시 서구 만년동 대전시립미술관 옆에 신축한 고암 이응노미술관 개관 기념전에서 미술관 측이 고암 연보와 도록에 출생지를 ‘충남 예산’으로 표기하면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은 몇 년 전에도 제기됐으나 자료에 근거해 고암 이응노 화백의 출생지가 ‘홍성’임이 명확히 밝혀진바 있다.


미술관 측은 올해 초 예산군이 보내온 고암 이응노의 출생증명서(제적부)에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라고 기록된 자료를 원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작가에 대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미술가의 연보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 미술관 측의 비전문성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2000년에 일부 도록과 자료 등에 출생지가 '홍성'이 맞는데 '예산'으로 잘못 기록된 오류를 정리한 서울의 고암미술관(관장 박인경,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의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예산군의 자료 제공에 의존한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이 놀아난 셈이다.

따라서 이번 논쟁의 이면에는 세계적인 화가의 명성을 통해 기득권을 선점해 보려는 지역이기주의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어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이에 홍성군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고암 이응노의 출생과 관련한 집안 연혁이나 족보, 토지대장 등에 △1883년(명치 16년) 조부 이현복이 사망하고 △1904년 1월 12일 고암 이응노는 홍주군 홍천면 중리 (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 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10년 12월 22일 부친 이근상이 홍주의병에 참여한 동생 이근주의 유품을 되돌려 달라고 작성한 탄원서(유족보관)상의 이근상 주소도 홍천면 중리로 기록돼 있다. 당시 고암의 나이는 6세였다.△1914년(대정 3년) 10월 24일 고암의 부친 이근상 명의의 대지가 홍성군에 보관중인 구 토지대장을 확인한 결과 흑암창태랑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는데, 당시 고암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이후 △1925년(대정 14년)에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로 전적된 것으로 기록됐음이 홍성군 홍북면에 보관중인 조부 이현복의 제적부에서 확인됐다. 당시 고암의 나이는 21세다. 한편 △1938년(단기4261) 고암 이응로가 34세 되던 해에 호적에 등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1910년 고암이 6세 되던 해 작성된 탄원서상의 주소가 홍천면 중리로 되어 있고, 1914년 고암 나이 10살에 집의 소유권이 흑암창태랑으로 이전됐으며, 1925년 부친 이근상(고암 나이 21세)이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로 전적했고, 1938년 고암의 나이 34세 되던 해 호적에 등재된 시점 등으로 볼 때 고암의 출생지는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가 명확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서 예산군은 수덕사의 수덕여관에 고암이 머물렀고, 전적지가 낙상리 24번지라는 사실을 근거로 고암의 출생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큰 착오가 있다는 점이다. 낙상리 24번지는 고암이 출생할 당시인 1904년에는 홍주에 속해 있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주면 중리의 일부가 예산으로 편입되면서 처음으로 ‘낙상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따라서 예산군이 주장하는 ‘낙상리’가 고암의 출생지라는 주장은 1904년 당시로는 전혀 근거가 없게 된다. 또한 홍천면 중리 386번지도 현재의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와 일치하므로 지번에 대한 주장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암 이응노는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가 출생지로 분명한 근거다. 결국 고암의 나이 34세에 다시 정리된 전적지를 근거로 출생지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특히 고암이 타계하기 직전인 1988년 10월 12일 조카 이강세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암 이응노는 ‘겨울이 되기 전 나의 고향 홍천동네의 원경을 사진으로 보내달라’고 명확히 기재한 내용의 편지가 보관돼 있기도 하다. 조카인 이강세 씨도 지난 2000년에 출생지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은 만큼 예산이 출생지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억지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고암 이응노의 조카 이묵세(80)씨는 “이응노 화백께서는 1904년 1월 12일 이곳 충남 홍성군 홍북면 홍천마을에서 출생했다. 낙상리의 집은 부친이 1925년에 지었다. 고암 화백께서는 가끔 놀러는 다녔다는 얘기를 부친으로부터 들었다.이후 당진을 거쳐 서울로 갔기 때문에 출생은 고사하고 살아보지도 않은 곳이 낙상리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조부 이현복의 제적부에 본적이 홍주군 홍천면 중리 386번지에서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로 전적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치 못하고 이응노 본인의 제적부상에 기록된 본적지를 근거로 예산이 출생지라는 주장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황선익 홍성예총지부장은 “지난 2002년도부터 미망인인 박인경 여사에게 ‘고암’이란 아호 사용을 승인받아 홍성에서 ‘고암청소년미술실기대회’를 개최해 왔으며, 올해 6회째를 맞이한다”고 밝히고 “이러한 논란은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하고 군에서 적극적으로 모든 면에 대처해 줄 것을 주문했다.


현재 홍성군은 고암의 생가지인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 일대 1만 3000여 평의 부지 매입을 끝내고 고암 이응노기념관을 건립 중이다. 지난해 문화재지정신청을 한데 이어 국비사업을 신청해 실시설계 등을 거쳐 올해 말이나 내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 논란을 지켜보는 주민들은 홍성군의 적극적인 대처와 신속한 사업추진 등을 주문하며 유가족의 애매모호한 처신이 오히려 고암의 예술세계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대전시는 1967년 고암이 동백림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인연으로 미술관을 유치하였고, 예산군은 고암이 머물렀던 수덕사의 수덕여관을 개보수하는 적극성을 보이는데 반해 홍성군은 고암 출생지인데도 기념사업 등이 부진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라는 지적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홍성출신의 세계적인 현대미술의 거장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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