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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째 가계부를 씁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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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째 가계부를 씁니다(1)
  • 홍성읍 신경순
  • 승인 2024.02.26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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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권씩이니 제가 가계부를 쓴지 벌써 60년이 돼 가네요. 저는 1963년 12월 24일 결혼해서 이듬해 1월 14일 시댁이 있는 천안 성환에서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이곳 홍성에 왔어요. 그동안 1남 2녀를 두었고 현재 제 나이는 85세입니다. 남편은 51년을 함께 살고 9년 전에 하늘나라에 가셔서 지금 혼자 살고 있어요.

살림을 시작한 1964년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가계부를 보면서 지난날을 잠시 회상해 봅니다. 제가 첫 살림을 시작할 때는 혼수 마련해온 이불 한 채, 쇠고리 1개, 양은솥 1개, 냄비 2개, 그릇 몇 개를 싸서 새벽 기차를 타고 시아버님을 따라 홍성에 왔어요.

남편은 경찰관이었어요. 아버님께서 쌀 5말, 연탄 50장을 사주시며 다음 달부터는 봉급으로 잘살아 보라고 당부하시며 가셨어요. 그 당시 월급이 3847원, 방 한 칸에 300원, 쌀 1말에 300원, 연탄 1장에 7원, 두부 한 모에 20원, 소고기 한 근에 80원으로 기록돼 있어요.

남편이 첫 봉급을 타왔는데 빗자루 등 살림에 필요한 도구 몇 가지를 사고 보니 돈은 표시도 없이 다 쓰게 되어 남편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어요. 몇 년 동안 공책에 쓰다가 조리 있게 써보려고 아기를 업고 서점에 가서 보니 가계부 한 권에 500원, 우리 형편으로는 너무 큰돈이라 만져만 보고 왔어요. 이듬해 또 서점에 갔는데 600원으로 올라서 못 사고 공책에 기록했어요. 1972년 옆집에 은행 다니는 분이 가계부를 주셨는데 거기에는 수입 지출 칸이 따로 있고 생활 일기도 쓸 수 있는 면이 있어 참 유용하다고 생각했어요.

가계부 첫 장 1월 1일에는 대부분 그해 소망이 쓰여 있어요.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셋방에 살 때여서 부엌도 따로 있고 좀 큰 방에서 살고 싶어 하는 꿈을 써놨어요. 1979년에는 냉장고를 사고 두레박 우물에 펌프를 달아서 시원한 물을 먹고 싶다는 얘기, 아이들 공부방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얘기도요. 그리고 논을 사고 싶다는 소망도 적혀 있답니다.

빚을 지고 집을 장만했을 때는 ‘돼지 새끼를 길러 빚을 갚아야겠다’ 이렇게 소원을 빌며 가계부를 썼는데 가계부는 나의 크고 작은 소원을 모두 이뤄줬습니다. 저는 우체국에 적금을 들어 현금 30만원이 되어 은행에 저당 잡힌 집을 대지 181평, 건평 25평짜리 기와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그때 집값은 70만원인데 33만원이 농협에 저당 잡힌 집이라 돈이 모자라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옆방은 10만원에 전세 놓아 집값에 보탰습니다.

집을 사기 전에 셋방에 살 때 첫아기 낳아서 홍동에서 홍성으로 백일도 안 된 아기를 안고 방을 얻어 이사했는데 방이 너무 추워 기저귀는 얼고 아기 뉘 울 자리가 없어 컴컴한 불빛 아래 연탄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그때 주인 할머니께서 보시고 아기를 안방에 재워주셨어요. 그때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희망이 없었어요.

우리는 방이 너무 추워 600원짜리 셋방을 얻어 이사했는데 비가 오면 연탄아궁이에 물이 고여 국자로 퍼내면 맑은 물이 더 나오고, 친정에서는 쥐들이 와장창 찍찍거리고 여름에 쥐, 이가 물어 아기 몸이 빨긋빨긋 헐어서 너무 속상했어요. 물론 그 당시에도 돈을 더 주면 나은 방을 구할 수 있었지만, 우리 형편에는 그런 돈이 없었기에 싼 방만 찾다 보니 환경이 좋지 않았답니다.

1965년 여름 쌀이 모자라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같이 세 들어 사는 분이 자기가 쌀을 얻어주겠다고 해 큰 시장으로 따라갔어요. 보리쌀 닷 되만 외상으로 달라고 하니 쌀 주인은 저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단번에 거절해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집에 와서 남모르게 울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 가난을 이겨내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1969년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유산 받은 돈으로 72년 방송국 자리에 땅 한 편에 400원 주고 800평을 32만원 주고 사서 밭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딸 아이 솜 포대기 둘러업고 보리밟기도 하고 보리밭에 인분을 줘야 잘 되는 줄 알고 셋째 아기 임신 중에 인분을 퍼다 준 일기장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방송국 밭에 가려면 인분통 지고 세 번을 쉬어야 밭에 가는데 열흘 동안 34번을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억척스러웠습니다. 1973년 여름에 4살 딸아이가 병이 나서 등에 업고 농사일을 하다가 임신 중이었는데 아기가 뱃속에서 사산돼 그해 농사지은 곡식은 병원비로 다 들어갔습니다. 그때의 비통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또 이듬해부터 열심히 농사일을 했습니다. 돼지 새끼 한 마리 사다 딸 아이 업고 시장에서 구정물 얻어 쌀겨 먹여 돼지 길러 농협에 빚도 조금씩 갚아가고 보리농사 지어 매상해서 빚도 조금씩 갚고 콩은 메주 쑤어 팔고 고추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 빚을 몇 년 동안에 갚았어요. 집을 사서 이사 와서 시장에 가서 병아리 14마리 사서 마당에 길러 처음으로 통닭을 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줄 때는 정말로 기쁘고 행복했어요. 알뜰 살림하느라 식구들에게 마음 놓고 고기 한 번 제대로 못 해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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