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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산, 남산, 보개산 주변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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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산, 남산, 보개산 주변의 바위
  • 김정헌 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24.02.09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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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바위 이야기 <22-끝>

해발 394m인 백월산과 274m인 보개산은 홍성읍과 구항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국도 29호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해발 220m인 남산은 홍성읍 옥암리에서 보개산으로 이어진다. 남산 동쪽으로는 홍성과 광천으로 통하는 국도 21호선이 지나간다.

배를 묶어놓던 꽃조개 배바위

배를 묶어놓던 꽃조개 배바위

홍성읍 남장리 남산 앞으로 국도 21호선이 지나간다. 혜전대학교 앞을 지나 구항면 마온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꽃조개’라고 부른다. 남산 앞을 지나가는 국도 21호선은 꽃조개에서 홍성남부순환도로와 교차하며 지나간다.

옛 문헌에는 고개 명칭이 ‘고조현(高鳥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날아가는 새도 쉬어가는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고조현은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하여 ‘고조개’로 부르다가 ‘꽃조개’로 굳어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꽃조개 광장에는 마온월드 예식장과 마온주요소가 있다. 이들 건물 뒤쪽 야산 언덕에 기둥처럼 생긴 우람한 바위가 서 있다.

옛날에는 광천 독배를 통해서 꽃조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애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 배를 묶어두던 바위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는 약 3m이고 둘레는 성인 남자 세 명이 안을 정도가 된다. 마온주유소 건너편 무지개아파트 뒷산은 소금산이라고 부른다. 옛날 이곳까지 배가 들어올 때 소금을 쌓아 놓았던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석보를 보관한 암벽 모습.

돌에 새긴 석보를 보존해 온 바위

보개산 남쪽 기슭 구항면 지정리 덕은동 암벽에 연산서씨 선조들의 족보를 돌에 새겨 보관해온 바위가 있다. 족보는 한 집안의 세계(世系)를 종이에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문의 내력을 종이가 아닌 돌에 새겨서 전해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연산서씨 선조들은 가문의 내력을 영구히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돌에 족보를 새겨 암벽에 굴을 파고 봉안했다고 한다. 석보가 제작된 시기는 1853년이며 직육면체 4판 8면에 4500여 글자를 음각으로 기록했다. 연산서씨 문중에서는 1996년 12월 5일 석보를 처음으로 개봉한 후, 홍주성역사박물관에 기탁해서 안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석보는 국내에서도 희귀하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고 학문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4호로 지정됐다

구항면 오봉리 전경.

구항면 오봉리의 유래가 되는 바위

구항면 오봉리(五鳳里)는 구항면소재지이며 백월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오봉리 서쪽에는 해발 108m인 오봉산(五鳳山)이 있고 동쪽 건너편으로는 백월산이 있다. 오봉산과 오봉리 지명 유래가 전설로 재미있게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무관 출신 홍주이씨 선조가 연로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아버지를 좋은 곳에 모시고자 유명한 지관을 불러서 산소자리를 물색했다. 초청된 지관은 홍주이씨 선산을 둘러보다가 월산 기슭에 산소자리를 잡아줬다. 이 자리는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자리라는 설명과 함께 주의할 점을 한 가지 가르쳐줬다. 산소자리를 조금만 파며 큰 바위가 나올 테니 그 위에 아버지 시신을 모시라고 당부했다.

장례를 모시는 날, 지관이 잡아준 산소자리를 조금 파 내려가자 정말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버지의 시신을 그대로 모시기에는 깊이가 너무 얕았다. 아들은 한참 고민하다가 일꾼들에게 바위를 밖으로 들어내라고 시켰다.

일꾼들이 바위를 들어내자, 바위 아래 짓눌려 있던 봉황새 다섯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봉황새 다섯 마리는 백월산 서쪽 건너편 산봉우리로 날아가 앉았다.

아들은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지만 소용없었다.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복을 날려버린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봉황새가 날아간 자리에 아버지의 산소를 썼다.

그 후로 봉황새 다섯 마리가 앉았던 산은 ‘오봉산(五鳳山)’이 되었고 산 아래 마을도 ‘오봉리’가 됐다. 지금도 백월산 서쪽 기슭 홍주이씨 선영에는 전설의 산소자리와 바위가 그대로 남아있다.

전설이 전해 오는 묘 자리
산소 자리에서 나왔다는 전설의 바위.

 

이시방 생가터 암각바위

백월산 서쪽 기슭 구항면 오봉리 봉지(鳳枝)마을은 연안이씨가 조선 인조시대부터 400여 년 동안 터를 잡아 살던 곳이다. 봉지마을에 처음 입향한 연안이씨 선조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연평부원군 이귀의 셋째 아들인 이시방(李時昉)이다. 의병 지도자였던 복암 이설도 봉지마을 출신으로 입향조 이시방의 후손이다.

옛 집터 뒤뜰에 ‘여허대(如許坮)’ 세 글자를 암각한 바위가 남아 있다. 전문가의 해석에 의하면 ‘여허(如許)’는 ‘이와 같이’ 또는 ‘이처럼’이라는 뜻이고, ‘대(坮)’는 ‘돈대’라는 뜻이라고 했다. 즉 ‘마음먹은 대로 이와 같이 모두 이루어지는 돈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봉지(鳳枝)마을 지명 유래도 연안이씨와 관련이 깊다. 연안이씨 선조가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이른 봄에 도착했다고 한다. 산에는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고 나뭇가지에 많은 새들이 아름답게 앉아서 우짖고 있었다. 연안이씨 선조는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고와서 ‘조지(鳥枝)’라 불렀으나 발음이 점잖지 못하여 ‘봉지(鳳枝)’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새까시’ 등으로도 부르고 있다.

연산이씨 집터 암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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