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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녹청자 부활시킨 도공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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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녹청자 부활시킨 도공의 혼
  • 김영찬 기자
  • 승인 2023.11.06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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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용 장인

지난 10월 15일 열린 청주비엔날레에서는 녹청자라는 생소한 도자기가 소개됐다. 이날 녹청자 제작 시연과 토크쇼의 대상이 된 인물은 도예가 김갑용 장인이다. 김갑용 장인에게 이날은 특별한 날이다. 자신이 오랜 세월 끝에 재현한 녹청자를 세계인들과 내국인에게 알리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녹청자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고단한 세월을 만나본다.

김갑용 장인은 홀로 녹청자 부활을 위해 10년 넘는 세월을 투자했다. 지금도 더 완벽한 녹청자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김갑용 장인은 홀로 녹청자 부활을 위해 10년 넘는 세월을 투자했다. 지금도 더 완벽한 녹청자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대대로 물려받은 도공의 피

인천시 연수구 동춘역 이마트 주차장 한 켠에 작고 허름한 도자기 가게가 있다. 김갑용 장인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김 장인은 홍성읍 금마 인산리가 고향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홍성에서 대표적인 점촌(점토가 나오는 곳)으로 부친도 옹기장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환경 탓인지 김 장인도 어릴 적부터 도예에 흥미를 가지고 집안일을 도왔다. 옹기 굽는 것을 그만둔 것은 일명 고무다라이가 등장하면서 부터다. 고지식하고 정직하기만 한 옹기장인 부친은 납 성분으로 광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옹기를 제작했기에 결국 옹기 사업을 그만두게 된다.

녹청자는 겉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도자기다. 옹기처럼 살아 숨쉬는 자기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녹청자는 겉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도자기다. 옹기처럼 살아 숨쉬는 자기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제 2 고향 인천에서 만난 녹청자

천한 직업이란 인식이 깔린 시절이었지만 김 장인은 도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모부가 인천에서 운영하던 도자기 공장이다. 이제는 제 2의 고향인 인천생활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백자를 만드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옹기에서 도자기로 만드는 것이 달라졌지만 서민들이 쓰던 옹기에 대한 애착은 여전했다. 그러다 인천 경서동에 녹청자 가마솥 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백자나 청자가 귀족들이 쓰는 용기인 것에 반해 녹청자는 서민들이 일상생활에 썼던 것이다. 김 장인은 이런 서민들이 썼던 그릇에 애착과 매력을 느꼈다. 저평가 된 서민들의 생활용기를 잇는 것은 도공으로써 사명감마저 가지게 됐다. 물론 녹청자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여년의 세월을 홀로 견디는 고난의 길이었다.

김갑용 장인은 녹청자 교실을 통해 일반인에게 녹청자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예술로써 녹청자를 계승하는 것이 도공으로써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김갑용
김갑용 장인은 녹청자 교실을 통해 일반인에게 녹청자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예술로써 녹청자를 계승하는 것이 도공으로써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김갑용

실전된 녹청자 부활 노력

과거 사료를 찾아보기 위해 책방이나, 국회도서관 등을 샅샅히 뒤져봤지만 남아 있는 자료는 없었다. 녹청자를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찾은 파편 쪼가리가 유일한 단서였다. 결국 스스로 시험해 보면서 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흙은 어떤 것을 썼을까? 유약은 어떤 것을 썼을까? 수 천번 도자기 굽기를 반복했다. 10년 간 겪은 시행착오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김 장인을 이끌어 준 것은 녹청자를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사명감과 제 2의 고향인 인천시를 대표하는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김 장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2009년 세계도시축전에 작품을 전시하면서부터다.

100% 재현은 아니었지만 8작품을 내놓았다. 인천시에서도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1090점을 귀빈들에게 선물로 증정하기 위해 주문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국빈 방문 시 선물로 쓰이기도 하고 교수들의 검증과 녹청자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김 장인이 시도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땅속에 묻혔을 녹청자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녹청자의 아름다움과 역사

김 장인은 녹청자의 매력으로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들었다. 녹청자는 무늬도 없고 투박하지만 옹기처럼 숨을 쉬는 도자기다. 제조과정에서 황토에 섞은 소나무재가 먼저 타면서 녹청자에 미세한 구멍을 만든다. 일반서민들의 삶의 곁에서 함께 살아 숨 쉬던 자기. 그것이 녹청자의 진면목이다.

녹청자의 재발굴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녹청자는 일본에서 먼저 발굴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구조와 기종이 인천의 가마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녹청자 전래의 과정을 증명하는 의미가 있다.

김갑용 장인은 녹청자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다. 녹청자가 결국은 인류의 유산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진 김갑용
김갑용 장인은 녹청자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다. 녹청자가 결국은 인류의 유산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진 김갑용

녹청자 계승 발전이 남은 꿈

김갑용 장인은 도예가로써의 사명을 가지고 녹청자를 만들었다. 녹청자의 아름다움은 인천의 것이면서 한국의 것이며, 세계의 유산이란 생각을 항상 품고 있다. 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정말 녹청자로 얻는 것은 별로 없다. 녹청자 제조를 위해 전통가마를 마련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사정이다.

김 장인은 “녹청자를 물려주고 싶은 일념이 강하다. 이를 위해서 녹청자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승 발전 시키는 것이 남은 꿈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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