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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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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설립
  • 신혜지 기자
  • 승인 2023.07.0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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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 고암리 출신…홍성제일감리교회서 목사 활동

1884년 1월 5일 홍성읍 고암리에서 태어난 이상만<사진> 선생은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침략 정책이 노골화되자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이상만 선생은 1914년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목사가 됐다. 1912년부터 1917년까지 5년 동안 홍성제일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1919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때까지 당진군 이배면 원당리 예배당으로 옮겨 목회 활동을 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후 4월 한국독립운동본부의 지령으로 홍성제일교회 유급 권사 이명제와 함께 중국 북경에 파견됐다. 이때 베이징에서 박정래, 조두진 등과 함께 신대한동맹회를 조직했다. 당시 이상만 선생은 신대한동맹회 총무를 맡아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과 자금 지원에 앞장섰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임시의정원은 우리나라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 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행정부, 국무원으로 구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당 다음 해인 1946년 2월까지 27년 동안 정부를 구성해 각종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각 지방의 한인 대표자 29명이 모여 구성해 출발한 후 국내와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지역을 대표하는 57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이상만 선생은 1939년 임시정부에 들어가 의정원 의원으로 지냈다. 임시정부와 의정원은 1940년 9월 중경으로 이동해 정책했다.

이상만 선생은 1941년 회계검사원 검사관으로 지냈다. 1943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됐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 등을 역임했다. 8·15 광복 후 한인교포협회 이사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안전 귀국 등을 돌보던 중 과로로 병을 얻었다. 1949년 귀국한 후 1955년 1월 8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나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데 뚜렷한 공적이 있는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홍성군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인 이상만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충령사에 공적비를 세웠다. 공적비 제막식은 지난달 30일 진행됐다. 군청 서일원 복지정책과장은 “홍성이 고향인 이상만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목사 활동을 하는 등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기독교연합회에서 적극적으로 설치를 추진해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를 설치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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