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5:36 (목)
“의병기념관은 반드시 의병투쟁 역사가 살아있는 홍성에 건립을”
상태바
“의병기념관은 반드시 의병투쟁 역사가 살아있는 홍성에 건립을”
  • 홍성신문
  • 승인 2022.12.11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성신문-충남의병기념관홍성민간유치추진위원회 공동기획

김태흠 충남지사는 의병기념관 건립을 공약으로 확정했다. 2027년까지 도비 300억원을 투입해 충남에 흩어져 있는 의병 역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시실과 체험실 등을 통해 의병에 대한 기념 및 기억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이다. 충남도는 현재 의병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기본계획 수립과 타당성 조사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용역 결과를 토대로 의병기념관 건립 장소와 방법을 확정하겠다는 계획이다. 순국선열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하는 일은 우리 후세대들의 몫이고 역할이다. 홍성신문은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와 함께 홍주의병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며, 왜 홍성군에 의병기념관을 건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strong>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 원장</strong><br>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 원장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홍주의병의 위치와 중요성은 무엇인가?

홍주의병은 홍성과 인근 지방 유림들의 지도하에 1차 의병인 1895년 을미의병과 2차 의병인 1906년 병오항일의병을 말합니다. 제1차 홍주의병은 홍성의 김복한과 이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입니다. 홍주향교의 김복한 중심의 의병 봉기는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뒤 12월 1일 수백 명이 홍주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가 설치되었고, 김복한은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지만,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주모급 23명이 구금, 제1차 홍주의병은 싸워보지 못하고 없이 강제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홍주의병은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光水장터(현,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습니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夏牛嶺(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가 철수하였는데 청양 화성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실패하였습니다. 5월 9일(음력 4월 16일) 민종식은 부여 홍산 지티에서 홍주의병진을 재정비하고 5월 13일(음, 4월 20일)에 홍산 관아와 이어 서천과 비인을 함락하고 5월 18일 5일간이나 전투 끝에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하였습니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홍주의병은 5월 31일 우세한 화력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를 하게 됩니다. 홍주의병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홍주의병의 홍주성 전투는 우리나라 중기 의병 중에 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기록된 의병전쟁입니다. 또한, 홍주의병의 결과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폭발할 수 있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홍주의병은 성패를 떠난 불굴의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포되지 않은 이들은 인근의 청양, 남포, 당진, 부여 등지에서 1910년까지 의병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홍성에는 홍주의병의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홍주읍성은 1895년에 1차 홍주의병이 일어났었고 1906년에는 1000명이 넘는 홍주의병이 5월 19일 되찾았다가 5월 31일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여 빼앗긴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홍주읍성에는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없어졌고 홍주의병들과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 사상자들이 발생한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홍주읍성 안 홍주의병공원 한 복판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의 자리는 본래 애도비(哀悼碑)가 세워져 있던 자리입니다. 애도비는 1906년 병오항일의병 시 의병들에게 죽은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던 매국노들을 애도하기 위하여 매국노의 일원인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글을 짓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글을 쓴 비(碑)로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적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홍성군민은 이 비를 철거하고 홍주의병의 영웅적 항쟁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홍주의사총은 병오항일의병 당시 전사한 수백 명의 의병군 유골이 임시 매장되었다가 해방이후 분묘를 조성하여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하였다가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고 매년 6월 1일 의병의날에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홍주의병은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일어나 의병전쟁이며 그 중심에는 홍주와 홍주읍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병기념관은 홍주읍성 안에 건립되어야 관련 유적지들과 상호 연계가 되고 의병기념관의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철학 홍주향교 전교

홍주의병을 통해 본 충남인의 선비정신과 의리정신은 무엇인가?

1895년, 1906년 두 차례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은 ‘사람답게’ 살고자 한 홍주의 선비들이 국망(國亡)이라고 하는 대결국(大結局)의 시기에 ‘위험이 닥치면 목숨을 던진다’는 각오로 떨쳐 일어난 의로움의 몸부림입니다. 선비된 자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 사람다움의 구현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학문을 연마하고 출사를 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마을에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울 때에는 사람다움이 행해지도록 자신을 바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니까요? 그런데 만일 나라가 없어진다면 어찌 될까요? 삶이 부정당하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 선비는 어찌 해야 할까요? 시정의 무리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선비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지산 김복한 선생은 ‘나라에서 녹을 먹은 이는 나라와 함께 죽는 것이 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선비로서의 삶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오욕(汚辱)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분의 사당에는 ‘추양(秋陽)’이란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따가운 가을볕에 만물이 소독되듯, 인간다움으로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모두 일소하신 분을 모신 곳(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 이라는 뜻입니다. 공자님처럼 평생을 사람다움을 이루기 위해 사셨던 분에게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홍주의병의 정신은 ‘사람다움의 구현’에 있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데 왜놈들이 들어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방해를 했습니다. 때로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라고 강요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도 참기 어려운데 선비된 자가 어찌 감내하겠습니까? 이에 떨쳐 일어난 것이 홍주의병이올시다.

나라가 망하면 사람답게 살고 싶어도 그리 살기 힘듭니다. 사람의 탈만 썼을 뿐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 스승님이 주신 가르침은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효(不孝)요 부제(不悌)일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이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람답게 살아왔으니 마무리도 사람다움으로 지어야 합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결의를 새기며, 문명을 수호하고 야만을 내치며, 바름을 호위하고 삿됨을 내쳐야 합니다. 세간의 평판에 마음 쓰지 말고, 부당한 요구에 흔들림 없이,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님은 가셨지만 넋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를 묵묵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려 사람다움을 이루고자 했던 님의 뜻을 추원(追遠)하나이다.

이정은 국가보훈처 연구원<br>
이정은 국가보훈처 연구원

충남의병기념관이 홍성에 건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홍성은 1896년과 1906년 전국 최대 최고의 의병항쟁이 두 차례나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홍성에는 2차례의 의병항쟁을 기억하게 하는 웅장한 홍주성, 병오항일의병기념비, 홍주관아, 홍주의사총 등 유적들이 남아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충남의병 하면 곧, 홍주의병을 연상하게 됩니다. 홍성은 서부 충남 지역민들이 치룬 큰 희생을 기억하는 중심지입니다.

5월 31일 홍주성을 점령한 일제는 6월 7~9일경까지 약 열흘간 수색과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6월 14일 주차군 참모장은 학살 83명, 피체 154명으로 보고했으나 홍주의병의 유병장 유준근 일기에는 의병 300명이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주성 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尹始永)은 일기에서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했고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어 6월 8일 매장했고 사상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리 지경 이내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홍주 의병항쟁에서 홍주의사총에 모셨다는 900여명이 산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홍주의병 희생자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중심은 홍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홍주의병은 충남인의 선비정신, 의리정신과 끈질긴 투쟁정신을 상징합니다.

홍성은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중심지로서 한말 전국 의병항쟁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위정척사 사상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사상적 기반이 있었기에 홍주성 전투 후 체포를 면한 의병들은 청양, 서산, 당진 등의 서해안 지역과 공주, 논산, 연기, 대전 등 계룡산 일대 산악지역,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가서 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당진 소난지도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의병은 10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홍주성 의병전투는 전국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의병항쟁이었습니다. 또한 홍주성 전투 참여자들은 박상진 등의 광복회에 참여해 1910년대 내 비밀 항일독립운동, 3.1운동과 이후의 의열투쟁으로 이어갔습니다. 즉, 홍성은 충남 선비들과 민중의 끈질긴 독립정신을 상징합니다.

홍성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했던 홍주성 의병항쟁의 중심지이며 투쟁을 상징하는 홍주성, 의사총 등의 유적이 있어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곳이고 부여, 청양, 보령, 결성, 예산, 당진, 서산 등 내포지역 총력 투쟁을 기억하는 중심지입니다. 홍주의병을 기념하는 일은 충남 내포지역 의병항쟁 전체를 기념하는 일로서 홍성이 그 대표성을 갖고 그 중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용록 홍성군수<br data-cke-eol=
">
이용록 홍성군수

홍주의병의 항일투쟁에서 배울 수 있는 민족혼과 나라사랑 정신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상 누란(累卵)의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스스로 일어난 의병이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한말의 의병은 의병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홍주의병은 충남 서부지역 일대를 통칭하는 홍주문화권 지역에서 봉기한 대표적인 항일의병이며,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남당 한원진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위정척사사상은 생사를 초월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한 주요 이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특히 홍성은 을미, 병오 홍주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순직한 곳으로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고장입니다.

1895년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에 대항하여 일어난 1차 홍주의병은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성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전을 펼쳤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대항하여 일어나 2차 홍주의병은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결국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일제와 치열하게 맞서 싸운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결과가 1910년대 독립전쟁과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졌고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대한민국을 있게 한 기초이자 디딤돌임을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야 하며 그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무수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의병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러한 의병의 초월적 희생과 나라사랑 정신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무형적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홍주 일대의 유생과 민중들이 연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며 민족이라는 구심체를 인식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 당파와 학파의 차이 등을 극복한 의병투쟁의 모습은 현재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 앞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마주한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위기 앞에 의연히 일어섰던 이 땅의 의병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과 목표를 위해 모두를 끌어안는 통합과 화합의 정신을 발휘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이 좌담회를 통해 선열들의 자기희생을 본받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원하며,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바치신 의병들의 넋을 기리고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 오신 유가족 여러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홍성군 역시 의병항쟁의 역사를 오늘날 되살리는 데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연우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br>
이연우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충남의병기념관을 홍성에 건립해야 하는 당위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서세동점의 시대 국가 누란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섰던 ‘홍주의병’을 기억하는 것은 지역 정체성 확보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홍성을 거점으로 구한말 전국적인 항일 의병투쟁에서 그 대표적인 대일 항쟁으로 손꼽혔으며, 일제의 정규군 파견과 경성의 헌병대, 공주의 관군, 청주 진위대까지 모두 가세한 대규모 전쟁이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그 막을 내렸습니다.

제1차 의병 활동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대해 1895, 4월부터 단발령 공표 직후까지 봉기하여 척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으며 제2차 의병은 을사늑약 후 1906년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통해서 결사 항거하였고 이는 한국 의병사에서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냈으며 그 뒤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

홍주의병의 항거는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민초들이 들불처럼 나서 나라를 지키고 잃어버린 국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던 대일 항쟁 전투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득권층과 집권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할 때 표현이 백성이 나서 나라를 구하고 국권을 되찾은 전국 최대 규모의 의병항쟁이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 이어 세 번째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조선은 말 그대로 외세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청국이 조선에 파병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왕비 민씨의 러시아군 파병 요청으로 러일전쟁과 민비 시해 사건은 야기됐습니다.

이러한 때 초야(草野)에서 유생과 유림들이 주축이 되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가세하여 일본 정규군과 맞서 싸웠던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이었습니다. 이러한 홍주의병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과 당위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한국 독립운동의 요람은 홍성(홍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홍주의병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중심 역시, 홍성일 수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홍주의병은 충남인의 정신이며 끈질긴 항일투쟁 정신을 상징하는 민족정신의 모토(Motto)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그런 홍성(홍주)에 새로운 충남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고 설계하는 중심지로 삼고 그 뜻과 정신을 기리는데 누구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임을 압니다.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유관기관 및 관련단체들 간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의 최적지로 홍성이 손꼽히고 있는데 이를 지역 간 이해관계나 지역이기주의로 치부한다면 세상의 비난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위성과 필연성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념관 건립을 통해 민족정신 고취와 새로운 충남의 미래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전 도민이 함께할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일제강점기 그 치열했던 의병항쟁에서 충남의 선비정신과 의리정신을 구현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지식경쟁 시대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해 내야 함은 개인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굳이 민선 제8기 공약사항으로만 치부하는 것 또한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장렬히 산화한 홍주성 순국열사들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면 그분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도 이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은 그분들의 혼백이 이미, 머물러 계신 이곳 홍성(홍주)에 유치하여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 역시 지자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면 지역의 인사, 관계자들을 모두 배제하고 전국적인 각계 기관, 단체 간 전문가그룹으로 구성한 ‘충남의병기념관건립선정위원회’에서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시·군 및 충남도나 국가보훈부에 설득력이 있고 부담 또한 없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선출직 공무원에게도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거듭 모두는 특정 지역이나 이해관계로 결정되는 것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최적지를 선택해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주의병의 항일무장투쟁은 1906년 이후 국내는 물론, 만주, 연해주까지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이 되었음을 다시 알아야 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