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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변해 버린 교육 현장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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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변해 버린 교육 현장에서 살아남기
  • 문성일 내포중 교사
  • 승인 2022.11.21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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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자본의 틀 안에서 삶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남보다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고 남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몸서리치게 악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는 이내 지쳐 가면서도 좋은 말과 언어로 또는 도덕적 허울을 씌우며 신을 찾고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며 나름 감사하며 다중의 혼란 속에 살아남고 있다. 이런 혼돈의 삶속에 나에게 빛이 되었던, 포틀래치, 이 단어 하나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쓰레기처럼 주는 선물 또는 증여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던 모스의 증여론에서 삶의 방향을 정했고 그리 살고자 하였다.

포틀래치란 무엇인지 이해를 돕고자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 보자. 어릴 적 할머니는 결혼식이나 제사 등을 다녀오면 손수건에 사탕이나 떡과 전을 싸와 손자에게 주었다. 그때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손자의 삶의 달라진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줄 때 ‘이게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 줄 아느냐? 소중하게 아껴 먹어라’라며 주신 분이 있을 테고, ‘이런 딱딱한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손자에게 주신 할머니가 있다고 치자.

이때 앞의 할머니의 말은 바로 손자에게 사탕을 주고 감사의 죄책감을 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마 이 말을 들은 손자는 할머니가 먹고 싶은 사탕을 내가 철없이 먹었다는 감사와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무게를 지고 삶을 살아갈 것이다. 반면 할머니에게 사탕은 별로 소중하거나 맛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왜 이런 것을 먹는지 모르겠다고 들은 손자는 감사도 죄책감도 없다. 그에겐 그냥 지금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게 포틀래치다.

그런데 이런 모스의 증여론에 얽힌 포틀래치가 오직 생존만이 난무하는 자본주의의 고난의 삶에 패배를 자인하고 내가 틀렸음을 슬픈 고백을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자본의 거래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도 교육도 심지어 사랑도 정당한 자본주의 교환과 거래만 있을 뿐이며, 인디언의 죽음은 예고되었던 것이다.

그래, 그랬다. 어린 시절 내 아버지의 삶은 참으로 지난하였다. 그 삶속에 돈은 삶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하숙비와 수업료를 줄 때 ‘이 돈을 어떻게 번 줄 아느냐? 아껴 써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난 이 말이 싫어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게 나에겐 큰 부담이었고, 아버지 삶의 무게를 내가 돈을 주고 바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수업료 납부를 다그쳤지만 난 고지서를 드리지 않았다. 아버지 삶의 무게로 얻은 그 돈이 나에겐 엄청난 무게로 날 옭죄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에게 화를 냈다. 이게 그리 싫었다. 차라리 혼나는 것이 돈을 달라는 것보다 나았다.

이 기억으로 난 아버지에게 죄인이다. 아버지의 삶의 무게로 얻어진 그 소중한 돈을 내가 써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죄책감은 감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난 그 상황이 오면 여전히 수업료를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만났던 모스의 증여론은 나에게 큰 빛이었다. 그래, 가장 소중한 것(돈)을 쓰레기처럼 주어야 자식이든 제자든 죄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학교 부임인사로 첫 마디가 잘 잊혀지는 사람이 되자고 말했다. 근데 이제 이 말이 자본의 거래 속에 포틀래치가 틀렸음을 자인한다. 이제 자본의 논리를 이길 수 있는 포틀래치는 죽었다. 있다면 상호 교환과 감사의 말뿐….

이 가을에 코로나 등으로 인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자본의 교육 현장을 보며 이내 학생들에게 소중한 사탕을 주고 나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해 볼까?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포틀래치를 상기하며 가장 소중한 것은 쓰레기처럼 주고는 잘 잊혀 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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