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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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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1>
  • 오영택 명지대 특임교수
  • 승인 2022.10.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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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람의 뒤에는 어머니와 부인의 한없는 ‘사랑과 희생’이 뒷받침되곤 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전설 김좌진 장군의 탁월한 성과에는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부인 오숙근(1887~1958)의 각고의 희생과 헌신이 뒤따랐다. 그러나 당시 남존여비(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와 여필종부(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르고 좇아야 한다)라는 유교문화 상황에서 이 두 여인의 생활상이나 수고에 대한 자료나 기록은 전혀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과연 지금까지 밝혀진 독립군의 영웅 김좌진의 성과와 전설에 이 두 분의 희생과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과연 이룰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해 본다. 따라서 이 두 분을 최대로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정리에 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 보고 3회에 걸쳐 김좌진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최고의 금자탑을 세운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은 음력 1889년 12월 16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1864~1892)와 어머니 한산이씨 이소사(1863~1949)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곧바로 형이 양자로 이적됨에 장남이 된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4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면서부터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성은 물론 의리 정신 민족수호 정신을 배우며 성장한다. 15세인 김좌진은 1904년 17세 규수 해주오씨 오숙근을 만나 결혼한다. 갓 결혼한 가장 김좌진은 곧바로 파격적인 행보가 시작되면서 개인과 가정은 급격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결혼 이듬해 1905년 김좌진 나이 16세에 집에 데리고 있던 30여 명의 노비를 해방해 주고 이들이 스스로 독립하도록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었으며, 성과 이름을 갖도록 마련해 주었다. 노비해방의 명분은 나 자신이 빼앗긴 나라의 국권 회복과 독립을 외치면서 가까운 집안의 가노들을 해방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귀족의 도덕적 의무’를 스스로 실천했다.

왜 김좌진은 편안한 길을 팽개치고 험로를 택했을까? 그는 제 발로 그 길을 선택했고 디딘 다음에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그 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대단한 길이었으나 개인과 가족들은 험난하고 비참한 길이었다. 더욱이 갓 결혼한 명문 가문 출신 새색시 오숙근은 여기서부터 한평생 파란만장한 독립운동가 부인의 길을 걷게 된다. 김좌진 3살 때 홀로된 시어머니 한산이씨를 모시며, 결혼 다음 해 1905년 노비해방, 자산분배, 평민으로 격하된 신분 등 남편 김좌진의 파격 행보에 맞춰 상상도 못 할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결혼 이후 오숙근은 김좌진의 풍상을 함께, 혹은 더 혹독하게 받아내며 김좌진의 그림자로 살았다. 명문 댁 규수에서 명문 댁 안방마님으로 바뀌었지만, 그 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더 혹독했다. 난관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오숙근은 결혼과 동시에 경성으로, 홍주로, 그리고 만주로 남편의 오직 한길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따른 ‘일제의 감시와 체포, 옥살이, 군자금 모집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난의 뒷바라지 여필종부의 길을 걷는다.

오숙근은 1917년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하자 2년 후 1919년 시어머니 한산이씨와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한다. 이후 1930년 1월 김좌진이 순국하자 주변을 정리하고 1932년 시어머니와 같이 귀국해 서울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1958년 1월 생을 마감한다.

오숙근은 1887년생이므로 김좌진보다 2살 연상이었다. 외모는 건강하고 단아했으며 무엇보다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알았고, 나아가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굳센 여인이었다. 여유 있는 명문 가문에서 가지런한 교육을 받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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