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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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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 홍성신문
  • 승인 2022.05.16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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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요열 홍성이주민센터 이사장

스리랑카에서 온 D는 원래 2020년 2월 입국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로 미뤄지다 2022년 1월 11일에야 입국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한국에 오고 싶었을까! 그러나 D의 부푼 한국생활의 꿈이 깨어지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월 22일 배 타는 일을 시작한 그는 4월 25일까지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일도 없이 토요일, 일요일에도 같은 시간 일을 했다.

하루 일과 후에도 쉼은 없었다. 사장은 몸종처럼 그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폭행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해 D가 받은 임금은 190만원, 190만원, 100만원이 전부였다. 심지어 사장은 외국인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외출조차 허락해 주지 않고 일만 시켰다. 4월 25일 밤 사업장을 도망쳐 나온 그가 우리 센터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외국인등록 기간이 지나 벌금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무엇보다 외국인등록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런 경우를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차별이란 말 외의 다른 어떤 표현이 가능할까. 독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세계 최빈국의 가난을 딛고 선진국인 된 나라, 그래서 이웃 나라의 동경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며 고용안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인 우리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견딜 수 없어 다른 사업장으로 가려고 하면 사장에게 ‘해고’를 애원해야 합니다. 사장은 해고해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농업에서 일하는 한 이주여성노동자는 “우리 숙소는 냄새가 심하고 곰팡이가 많아 사람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숙소에 유류비, 가스비 등 120만원의 숙소비를 내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가라고 해서 자전거로 30분 이상 거리의 몇몇 다른 농장에 나가 일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런 것이 차별이라고 말한다.

UN의 여러 차례 권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주노동자의 직업 선택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고용허가제와 열악한 숙소의 부당한 비용청구와 불법파견 노동착취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고 무엇일까?

‘당신은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누가 ‘그렇다’고 대답하겠는가? 차별에 동의하고 차별을 좋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을 바꾸면 조금 사정이 달라지지 싶다. 물론 겉대답은 ‘안 된다’고 말하겠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차별받는 것은 참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차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차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외국 사람들까지 챙기기엔…”

1930년대 나치 선전물 중에 장애인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위에 6만RM 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포스터를 본 일이 있다. 6만RM 글자 아래는 ‘국가 사회는 유전적으로 병약한 사람에게 평생 6만RM(독일 마르크)의 돈을 써야 합니다. 시민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의 돈입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런 갈라치기 차별에 대해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가 지지를 보냈고, 자신감을 얻은 나치는 1939년부터 아리안 민족의 인종 개량을 발목 잡고 경제적으로 쓸모없다며 선천적 장애인을 20만명이나 가스실로 보냈다.

이후 수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슬라브인들(폴란드인, 러시아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나치반대 정치범,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집시와 동성애자들을 차례로 처치한 나치는 600만명의 유태인까지 학살했다. 나치는 경제공황의 불만을, 아리안 민족 우월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나치의 장애인에게서 출발한 차별과 혐오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방관하거나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결국 그 희생 대열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항상 소수였고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아니, 차별과 혐오는 그 자체가 약자를 짓밟는 속성이 있다. 차별과 혐오는 마음껏 짓밟고 조롱해도 찍소리 못할 약자들을 향한 집단적 폭력이다. 반면, 차별 대상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과 혐오를 통해, 사실은 뺏기지도 않은 권리를 되찾은 듯 착각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정치판에서 차별과 혐오는 인기 종목이다.

그러나 누구나 노골적으로 차별을 찬성할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 역사와 경험의 결론은 분명하다. 차별은 금지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는 인간답지 못한 비겁한 짓일 뿐이며 차별과 혐오를 막지 못하는 세상은 지옥이 된다. 외국인인 이주노동자의 차별을 막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이주노동자를 차별해도 된다면 언젠가 누구도 차별 받을 일이 생길 것이다. 장애인이니까, 성정체성이 다르니까, 소수자이니까, ~~니까 차별해도 되고 차별받아도 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때마침 공정과 상식을 앞세운다는 정부가 출범했으니 한번 묻고 싶다. “혹시 아직도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십니까? 공정과 상식에 ‘차별금지’는 포함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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