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6:51 (화)
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홍주읍성
상태바
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홍주읍성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8.10.29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읍성 성벽의 성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고장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홍성군청 주변으로 사적 제231호인 홍주읍성이 자리 잡고 있다.

 홍주읍성은 조선 문종 대(1451년)에 신축하고 현종과 순조와 고종 대에 증개축한 기록이 있다. 홍주성수성기적비에 의하면, 현종 때 한계수에 의해 중수되고 순조 23년(1823년)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해서 수리되었다.

 이후 고종 7년(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증개축을 한 기록이 있다. 당시 전체 성벽의 길이는 약 1772m이며 높이는 33m이고 현재는 전체 성벽 중에서 약 800여m 정도가 남아있다.

 홍주읍성의 남아있는 동쪽성벽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참으로 특이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에 쌓은 성들의 성돌은 자연석을 약간만 다듬거나 원형대로 이를 맞춰서 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홍주읍성에는 자연석이 아니라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아놓은 성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 성돌은 자연석을 옮겨온 것이 아니라, 다른 건물의 기단에 사용했던 잘 다음어진 장대석들을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성돌은 잘 다듬어진 돌에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찰에 세웠던 탑의 몸통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이다. 아마도 옛날 어떤 사찰에 세워놓았던 탑을 해체하여 옮겨다 성돌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2013년에 홍주읍성의 남문인 홍화문과 주변 성벽을 복원하면서 상당수의 사찰부재가 발견되었다. 지금 현재 홍주역사박물관 후면 공터에는 당시에 홍주읍성 성벽에서 수습된 다수의 사찰부재가 놓여있다.

그렇다면 이들 성돌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추측컨대 홍주읍성에서 가까운 사찰의 건물 부재와 탑 등을 해체하여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홍주성의 많은 성돌들은 가까운 사찰의 건물부재이며, 이는 곧 조선조의 억불숭유정책이라는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11월에 공주박물관에서 충남향토문화연구협의회 주관으로 제1회 충남향토사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홍성군 문화해설사인 한건택씨가 ‘홍성 광경사지와 홍주성’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내용에서 홍주읍성 성돌의 비밀을 풀어주고 있다.

 
 

▲ 탑신으로 보이는 성돌

광경사와 미륵사는 같은 사찰일 가능성

 홍성 광경동사지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미륵사(彌勒寺)란 사찰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는 미륵사가 홍주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담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동국여지지에도 미륵사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보면 홍성군지의 홍성광경동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동국여지지의 미륵사는 같은 사찰로 보여 진다. 그러므로 홍성 광경동사지의 이름은 홍성 미륵사로 칭해야 한다. 앞으로 홍성 동문동 당간지주는 홍성 미륵사 당간지주로, 홍성 광경사지라고 기록된 모든 자료는 홍성 미륵사(이하 미륵사)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 탑신으로 보이는 성돌

미륵사는 억불숭유정책에 의해 폐사

 미륵사는 조선 초기(태종에서 세종연간)의 억불숭유정책에 의해 폐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사정비정책은 각 사찰의 노비를 줄임으로써 결국 사찰 소유 토지까지도 소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많은 사사의 토지는 국가에 몰수 되었다. 국가적으로 태종대에는 전국 242개 사찰로, 세종대에는 다시 36개 사찰만을 남기고 사찰 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결국 미륵사도 이 정책에 의해 이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유교적인 제도와 문물을 정비해 나가면서 이에 소요되는 물적 기반을 백성들에게 전가하지 않고,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원의 기반을 활용하고자 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사찰의 활용 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 건물까지도 역ㆍ향교와 관아 및 유교적 시설로 전용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 중앙과 지방의 관청을 신축하거나 중건 할 때 폐사지와 재와를 이용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야광사(野光寺)의 예와 같이 기존의 사찰을 훼철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외 역ㆍ원ㆍ창 및 향사당 등의 경우 사찰을 훼철하여 건립됐다. 그리고 기존의 건물을 수리하는데 수령으로 하여금 폐사의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선왕조 억불숭유책 속에서 미륵사의 구체적인 폐사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 홍주읍성 성벽에서 수습된 사찰부재

홍주성벽 성돌은 미륵사 건축물 부재

 홍주성 성벽의 주 석재는 폐사된 절터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폐사된 절터의 탑과 석재는 홍주성의 축성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홍주성 성벽을 살펴보면 미륵사탑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을 발견할 수 있다. 홍주성의 동쪽 성벽에 안상(코끼리 눈과 같다하여 안상이라 함)을 장식한 불상대좌 혹은 탑의 기단부로 추정되는 석재를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건축물의 기단을 지탱하는 장대석 등 각종 다듬어진 석재들이 홍주성 성벽으로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고, 이 석재는 가까운 미륵사에서 나온 석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을 신축 하거나 중건할 때 폐사지의 재와를 이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홍주성 또한 성벽 축조 당시 성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폐사된 미륵사의 석재들이 중요하게 사용된 것이다.

 홍주성의 조사과정에서 탑신부의 옥신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상당수 발견하였다. 미륵사에서 나온 모든 석재가 홍주성의 축성에 사용되었고, 미륵사의 건물과 기와는 홍주성의 관아 건물과 홍주향교 건물 등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재 미륵사지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