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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랑합니다”…언제나 빛나는 어머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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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랑합니다”…언제나 빛나는 어머니 사랑
  • 최기주 기자
  • 승인 2022.05.16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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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화·이병학 모자
이병학 씨의 어린시절 모습. 추석 때 집안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주신다 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 씨의 앳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병학 씨의 어린시절 모습. 추석 때 집안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주셨다고 한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 씨의 앳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명화·이병학 모자의 모습.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이명화·이병학 모자의 모습.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이 씨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 한 편이 찡하다고 한다. 부모님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이 씨의 모습.
이 씨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 한 편이 찡하다고 한다. 부모님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이 씨의 모습.

50주년을 맞이한 어버이날이 지난 8일에 지나갔다.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기리는 어버이날의 출발은 본래 ‘어머니날’에서부터였다. 어머님 은혜는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다”고 하던가. 어버이날을 맞아 홍성군 내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어머니를 만나 봤다. 장한 어머니상과 홍주문화상을 수여받은 이명화(93) 여사와 아들 이병학(74) 씨의 이야기다.

등잔불 밑에서 홀로 자식 키워

이병학 씨는 홍동면 금평리 출신이다. 모친 이명화 여사는 1946년 당시 홍동초 교사였던 이기성 씨와 결혼하여 이 씨를 낳았다. 하지만 6·25 전쟁 속에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고 이 여사는 홀로 갓난아이였던 이병학 씨를 키우게 됐다. 이 씨는 “이 때의 어머니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되어 버린 곳에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도 생각해 보면 가슴이 찡하다”고 말했다.

특히나 시골에서는 더더욱 일거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 여사는 어린 이 씨를 키우기 위해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등잔불 밑에서 길쌈을 해 가며 생업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 씨는 “특히나 기억에 남는 건 등잔불이다. 어머니가 밤새 등잔불 밑에서 길쌈을 하시고 아침에는 그 불로 밥을 지어 주신 게 기억에 남는다”라며 “이 등잔불이 나를 지킨 작지만 따뜻한 불빛이라 생각한다. 우리 가족사진에도 이 작은 등잔이 같이 나올 정도로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 씨는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홍동초를 졸업하고,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홍성중에서 학업을 이을 수 있게 된다. 고등교육은 넉넉지 못한 사정 때문에 포기하려 했지만, 풀무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인 주옥로 선생의 도움으로 풀무학교에 입학하고 학업을 이어 나갔다. 이 씨는 “정식 교육과정은 아니었지만, 내겐 너무 소중한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 도움 덕분에 이 씨는 검정고시를 치고 풀무학교 개교 이래 첫 번째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이 여사는 이 씨를 위해 생업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슈퍼가 없었던 시절이라 보따리 상인들이 시골 이곳저곳을 다니며 각종 생필품을 판매할 때다. 이 여사도 홍성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해가며 이 씨를 키웠다.

이 여사가 온갖 고생을 해가며 아들을 장하게 키워냈다는 소문은 발빠르게 퍼졌고, 1971년에는 신광철 홍성군수로부터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받게 된다. 아들 이 씨가 교사가 되어 홍동초로 발령된 뒤 바로 다음 해의 일이었다.

이 여사는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받고 2001년에 홍주문화상을 수여받게 된다. 그 갖은 어려움 속에서 아들을 건강하게 키우고, 남편의 일기와 역사적 자료들을 잘 간직하여 아들 이 씨가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는 공로를 인정해 준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굉장히 큰 행사여서 당시 시상식장인 홍주종합경기장엔 수많은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 씨는 “그 군중들 속에서 어머니가 상을 수여받으시는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밖에…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 이 씨가 교직에서 은퇴하고 자식들도 다 크고 자라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이 여사 역시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야 할 정도로 쇠약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는 이 여사에게 아들을 키우며 어떤 점이 가장 뿌듯했냐고 질문했을 때, 이 여사는 “그저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줘서 뿌듯하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이어 어떨 때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아들이 크게 아픈적이 있는데 그럴 때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고 말했다. 그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들의 건강만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반면, 아들 이 씨는 어머니와의 기억에서 후회되는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 씨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게 됐을 때 어머니를 홀로 두고 타지에 가야 한다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라며 “아직까지도 옆에 있어드리지 못한 부분이 후회로 크게 남는다. 어머니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가늠이 안 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후회가 컸던 이 씨지만, 그런만큼 어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있었다. 이 씨는 “사실 크게 욕심 없고, 어머니께 자식의 도리를 다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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