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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선생이 자주 찾아갔던 고향마을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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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선생이 자주 찾아갔던 고향마을 우물
  • 홍성신문
  • 승인 2021.05.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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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생명수, 마을 샘 7
이응노 선생이 자주 찾았던 우물. 뒤쪽 건물은 기념관 서고.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은 고암 이응노 선생의 고향이다. 이응노 선생의 생가 50여 미터 쯤 뒤쪽으로 오래된 우물이 전해온다. 이 우물은 고암 이응노 선생이 어린 시절에 자주 찾았던 의미 깊은 장소이다.

옛날에 이응노 생가기념관 주변을 ‘넷뜸’이라고 불렀다. 마을에 대문이 있는 큰 집 네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넷뜸이라고 불렀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온다. 지금은 ‘뒷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응노 선생의 생가는 복원되기 전까지 집안 후손이 살았다. 생가터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던 주민은 이응노 선생의 증손자뻘 되는 이승호 씨다. 그는 이응노 선생 생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50대 후반까지 살았다.

샘물을 퍼 올리는 이승호 씨.

이승호 씨가 이응노 선생의 생가에서 살게 된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한다. 이승호 씨의 할아버지가 이응노 선생의 부친으로부터 생가를 사서 이사 왔다고 한다. 이후 할아버지 때부터 손자인 이승호 씨까지 3대가 이응노 선생의 생가에서 살았다. 이응노 선생의 부친이 무슨 이유로 집을 팔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가기념관 옆에 남아있는 우물은 이승호 씨의 큰 할아버지네 집 울안에 있었다. 현재 이응노 선생 생가 기념관 서고가 자리 잡은 곳이, 큰할아버지네 집터였다. 이응노 선생 생가에서 50여 미터 뒤쪽 산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이승호 씨의 큰할아버지는 고암 이응노 선생과 동갑인 아들이 있었다. 이승호 씨의 큰할아버지 아들과 고암 이응노 선생은 5촌간이었다. 이응노 선생의 촌수가 높아서 당숙이 되고, 큰할아버지 아들이 조카였다. 하지만 둘 사이가 동갑이어서 친구처럼 서로 사이좋게 오가며 지냈다.

이응노 선생 생가 주변 모습. 생가 뒤쪽 모퉁이에 우물이 있다.

당숙과 조카는 어린 시절부터 고향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십대 시절에는 백월산과 용봉산으로 함께 나무를 다니기도 했다. 산에 올라가면 이응노 선생은 나무보다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한다. 동갑내기인 조카는, “당숙은 산에 와서 나무는 안하고 그림만 그리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조카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느라고 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당숙을 위해 자신의 나무를 나눠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에 이응노 선생 댁에는 우물이 없었다. 이응노 선생은 어린 시절 동갑내기 조카 집 우물에서 물장난을 수시로 했다. 십대시절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오거나 날이 더울 때마다 우물에 와서 함께 등목도 하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기도 했다. 현재 마을에 전해오는 우물은 고암 이응노 선생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사용하던 우물인 것이다.

우물 속 모습.

고암 이응노 선생 생가기념관은 2005년경부터 복원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승호 씨는 생가 복원사업 추진과정에서, 이응노 선생의 생가이면서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고향집을 홍성군에 매각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은 2011년에 준공됐다.

고암 이응노(1904~1989)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국 광복, 6·25 한국전쟁, 남·북 분단 등 한국 현대사의 아픔 못지않게 개인적으로도 많은 시련을 겪어 온 예술가였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중에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69년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파리로 돌아갔다. 1977년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의 북한 납치 미수 사건에 휘말리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고국에서는 반체제 인사로 몰려 귀국은 물론이고 국내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외로운 타국생활과 국내의 정치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화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들은 전통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살아 생전에 고향땅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카에게 ‘내 고향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끝내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1989년 1월 파리의 봉인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고, 파리 시립 페르라세즈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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