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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홍주)은 한국불교 역사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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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홍주)은 한국불교 역사의 중심축이었다
  • 홍성신문
  • 승인 2021.05.1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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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내포지역 정체성 대표하는 지역
내포 정체성은 단연 정신문명과 충절
정경스님, 수덕사 총무국장, 간월암 주지

홍성 출신으로 홍성의 지역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인물 중에 불교계는 세 분의 큰 스님들이 있다. 한 분은 고려시대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국사이고,다른 한 분은 근세 수월 음관(1855~1928)스님, 그리고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선사이다.

태고 보우국사는 1700년 한국불교를 잇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고려말 구산선문 선종불교의 통합을 도모한 큰 스님이다. 태고 보우 스님은 13세에 출가하여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1356(공민왕 5) 왕사(王師)로 책봉되었고, 1371년 국사가 되었다. 1356년 고려 공민왕 5년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하여 조선시대까지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큰 역할을 담당했음은 태고 보우국사의 공이 컸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스님은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공민왕에게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는 등, 불교계의 통합과 정계(政界)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수월 음관스님은 어릴 적 부모를 여의어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로 연명을 했다. 20세까지 전혀 글을 배우지 못했고 29세에 천장암으로 출가했다. 스님은 조선 500년의 억불정책으로 꺼져가던 한국 근대 선풍을 크게 일으킨 경허스님의 맏상좌가 되었다. 스님은 혜월・만공 월면 스님과 함께 ‘경허스님의 세 달’ 중 맏형 노릇을 했던 것이다. 스승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글을 모르는 수월 스님은 ‘까막눈 선사’였음에도 금강산 마하연 선방의 조실을 지낸 분이다.

스님이 천장암에 출가해서 화두는 자나깨나 ‘천수경’을 외는 것이었다. 스님은 천수대비주를 알게 된 후 일념으로 염송해서. 행주좌와 어느 순간에도 천수 주력을 놓지 않아 불망념지(不忘念智-한번 들으면 잊지 않음)를 중득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다.

스님이 천장암에 머무는 동안 천장암 아래 장요리 마을사람들은 천장암에 몇 번이나 달려왔다고 한다. 천장암에서 비추는 서광이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불을 끄려고 달려와 보면 천장암은 아무 이상이 없고, 방광(放光 수행자의 몸이나 성스러운 물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한 수월스님의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수월스님의 수행력과 도력, 그리고 주민들에게 존경받았던 스님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후 경허스님의 인가를 받은 스님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몸을 숨긴 채 수행자의 삶을 묵묵히 실천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함은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쓴 ‘달을 듣는 강물’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선사는 일제 강점기 출가 수행자이자 민족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선사는 열여덟 살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로 돌아 다니다 27살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조선 500년의 억불상황에서 정체되었고, 일제 강점기로 왜곡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면서 언론, 교육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불교의 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서서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하고 독립지사(志士)들과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말년에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성북동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수덕사 만공스님과 만해스님이 독립운동으로 내밀한 관계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만해스님이 서울 등 외부에서 독립운동에 힘쓸 때 지근거리에 있는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후원하였고 조선왕실의 후손들까지 돌보게 되어 고려왕실의 거문고가 수덕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이다.

근대 한국 불교의 두 거장이신 한 분 만공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 내며 미나미 총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면, 다른 한 분 만해선사는 민중들 속에서 한국불교의 개혁과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니 내포와 홍성의 자랑은 천년의 역사를 두고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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