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온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마을 이야기 구항면 청광리 청광마을<1> 살아있는 역사책, 이완순 할머니

2019-03-03     guest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성 지역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고 걷기 좋았던 9월의 날들. 청광마을을 들어갈 때마다 뚜벅이 여행자가 된 듯 자유롭게 거닐었습니다. 많은 주민분들이 늘 반갑게 맞아주셨고 집, 마을회관, 논밭, 나무그늘 아래 등 여러 자리에서 편안히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살아나온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살아있는 역사책, 이완순 할머니

메말라있던 땅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고 난 9월의 어느 날, 멋스럽게 지어진 집 앞 마당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따스한 가을 햇볕 아래에서 만난 이완순(86) 할머니.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 편히 앉으라며 의자를 건네신다. "마을에 대해서 아는 거는 워디 가지 않고 오지 않으니께 잘 모르고 나 살아나온 거는 연태 이적지 살은 거지.

" 완순 할머니는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던 인생 이야기를 덤덤히 시작한다. 이곳에 온 지 7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친정집을 떠나오던 그날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전시에 걸어서 시집와갖고 살아나온 그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그땐 가마도 못 탔다니께. 갑자케 오느라고. 새벽에 걸어왔어.”

군인이었던 남편이 열흘간 휴가를 나왔을 적에 서둘러 올린 결혼식. 혼례를 올리고 고작 이틀 밤을 지새운 뒤 남편은 다시 부대로 떠났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휴전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온전히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동안 완순 할머니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한 세월을 보냈다. 농사, 장사, 길쌈 등 안 해본일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고달프고 어려웠던 일은 광산일이었다.

“다래울에 색면광산이 있었는디 어지간한 사람은 광산 대니지도 않고 인저 생활력 어렵고 좀 째고 허는 사람만 대녔지. 그때는 젊었으니께 어려운 줄도 모르고 산 넘어갔다 넘어오고 아침저녁이루 그렇게 혔는디 지끔은 밭이도못 가. 밭이두 어려워(웃음).”

청광마을에서도 좁은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야 있는 산골짜기 동네, 다래울. 뒷산에 푸른빛의 돌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일제강점기 때 그 일대가 전부 석면광산으로 개발되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이곳저곳 다른 마을 사람들도 광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몇 십 년간 광산의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돌막을 굴이서 파내오믄 망치로 깨쳐서 색면을 골러서 담았지. 돌막은 내삐리고. 하얀 색면 빤질빤질허니 그 놈을 인저 기계다 빵궈가지고 솜허고 섞어가지고 자서서 토생이 해서 허믄, 그걸로 이런 거 저런 거 다 모든 걸 맨드는 거더먼 그려. 가빠 같은 거, 방아 찧는 피대 같은 거나 별거 별거 맨들으니께.”

어릴 적부터 해오던 농사일과는 또 다른 일. 매일 아침 광산에 가기 위해 산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오후까지 일하고 나면 두 손과 온몸이 하얗게 변하곤 했었다. 온종일 서서 일하니 다리도 퉁퉁 부었다.
“밥 싸갖고 가믄 도시락이 얼어. 얼으면 그 탄 위다가 올려놨다가 미저근허면 점심 먹고. 겨울에 눈이 와도 가고.”

늘 고단했지만 그럼에도 쉴 수 없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들, 고이고이 낳은 자식들까지 먹을 입을 나누는 식구들이 많았기에. 밤에는 길쌈하랴, 틈틈이 농사일 도우랴, 시댁 식구들 식사 준비하랴, 아이들 키우랴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네 시대는 낮잠 잘 새가 워디가 있어. 저녁에도 온잠을 못 자고 살아나왔지. 애덜하고 워쳐게라도 살라고 그렇게 헌기지.”완순 할머니는 그 시절을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살아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컴컴하고 깊은 터널을 걷는 것처럼 참 지독하고 어려웠다고. 삶의 한자락을 차지했던 광산에서의 시간은 30여 년 전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막을 내렸다.

“지끔은 행복허게 사는 거지. 따지면, 이전에다 대면. 안 헌 거 없이 다 해보고.” 때로는 먼저 간 남편이 그립기도 하고, 지난 시절 자신보다 자식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사무치듯 더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작년부터는 큰 아들이 내려와 곁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어 외로움도 덜하다.

“얼마 전에 티브이 보니께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자기 살은 얘기를 허데. 나도 저런 데 나가서 얘기허믄 할 얘기가 많을 텐디 싶기도 허고. 핵교를 못 나오고 못 배워서 얘기를 못 헐라나?”

어느덧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 식물로 치면 통통하게 영근 씨앗을 떨어트리는 때와 같지 않을까. 잘 여문 씨앗처럼 할머니가 몸소 살아낸 세월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이 빛이 난다.

할머니,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문수영, 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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