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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 소향리 소향2리 - 사람 사는 이야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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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 소향리 소향2리 - 사람 사는 이야기 ③
  • 홍성신문
  • 승인 2020.05.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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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하고 활력넘치는 소향2리 부녀회
마을회관에 모인 부녀회원들

소향리는 밝을 陽(소)자에 향 香(향)자, 마을 里(리)자를 써 陽香里(소향리)라 부른다. 백제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해풍현에 속했다가 고려 때는 홍주 관할에 있었다.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주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마동, 소동, 월계리, 북촌리, 교동 및 향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소향리라 하고 홍양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된 홍성읍에 속하게 되었다.

본래 소향2리는 교육청 소속의 국유지로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산이었다. 당시 박철 홍성군수와 손재학 제헌 국회의원(1948년 5월 10일 시행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홍성군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이 소향2리를 시찰한 뒤 피난민정착지로 결정하고 흥성역 주변에 모여 살던 피난민들에게 토지 무상임대를 조건으로 이주시켰다.
‘유엔 한국 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_1950년 12월 1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엔 기구로 1953년 휴전 이후 재건 사업을 시작해 피난민 및 거주공간을 잃은 이들을 지원하는데 주력했으나 1958년 자금조달 문제로 사라졌다)’에서 미송 각목, 못, 루삥(타르를 먹인 방습지) 등 주택자재를 지원받아 피난민들이 직접 거주할 집을 지었다.
1953년 10연동 연립주택 6채를 지어 60세대를 형성하고, 1955년 2연동 연립주택 50채를 지어 100세대를 형성했다. 이주 초창기에는 미군 구호물자 배급과 산을 개간해 작물을 심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1958년경 미군의 구호물자가 끊기며 점차 외부 직업을 구하거나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1962년 무렵 기차를 타고 홍성을 지나가며 벌거벗은 산을 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으로 산림청 주관 녹지사업인 사방공사를 시작했다. 소향2리 마을 뒷산과 백월산에 떼를 입히고 어린 나무를 심는 작업은 1972년경까지 10년간 이어졌고 사방공사로 생계를 꾸려나간 주민들도 있었다.
1965년 3월 3일 홍성군은 교육청 부지로 되어 있는 소향2리 토지의 약 4분의 3을 개인에게 매매하고 명의를 이전했다. 약 1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득신 씨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모여 대책을 강구해 정부 도처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966년 12월 6일 공유지 매매 및 명의 이전이 해지되고 다시 환원되었다. 1971년 정부가 환원된 소향2리 토지를 5년 분할 상환 매매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토지를 개간해 온 소향2리 주민들에게 매매를 해달라는 청원을 꾸준히 넣었다. 1989년 정부 요처에서 해결을 지시, 소향2리 주민들에게 5년 분할 매매했다.
과거 소향2리는 총 6개 반으로 나눠졌는데 인구수가 줄어들어 현재는 4개 반으로 구성된다. 마을에서는 1반을 60세대, 2ㆍ3ㆍ4반을 100세대라 부른다. 1980년대 중반 마을 남쪽에 쓰레기매립장이 세워졌는데 여름이면 악취가 나고 벌레가 창궐해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다. 1990년대 초반 홍북읍으로 이전한 뒤 1993년 그 자리에 홍주종합경기장이 준공되었다 .

마을회관 문을 열면 따뜻한 온기와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틈나는 대로 회관에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먹을거리를 나누는 부녀자들의 모습을 보면 소향2리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유달리 살갑고 사이좋은 소향2리 부녀자들. 그 끈끈함의 중심에는 부녀회가 있다.

1980년대 중반 황금예 씨가 부녀회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소향2리 부녀회가 탄생했다. 황 씨가 부녀회장을 하던 당시에는 부녀회원 없이 부녀회를 꾸려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8년 마을총회를 통해 김순옥 씨가 부녀회장으로 선출되었고,부녀자들에게 부녀회 가입을 장려했다. 매달 3일을 부녀회 회의 날로 정하고 한 달에 3000원씩 회비를 걷어 부녀회기금을 만들었다.
“내가 부녀회장을 약 30년 정도 했어요. 처음 당선되고 결심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마을 쓰레기 치우는거랑 동네 애경사 잘 챙기는 거,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랑 관광 가는 거. 이 세 가지는 꼭 해야겠다 했어요. 그때 당시에 마을 온갖 곳에 비닐이 널려 있고 엄청 지저분했거든? 이런 상태를 후손에게 물려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부녀회원들이랑 매년 봄 하고 가을에 마을 전부 돌면서 쓰레기를 주웠어요. 오토바이 타고 읍사무소 가서 자루 받아오고 부녀회 기금으로 쓰레기 집게 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청소했지. 첫해는 쓰레기가 많아서 진짜 하루 종일 걸렸는데 다음해부터는 청소를 해 둬서 그런지 반나절이면 끝나더라고요. 애경사챙기는 것은 동네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하고. 마을 관광은 먹고 사느라 바빠 일만 하잖아. 그냥 동네사람들 바람 한 번씩쐬어주고 싶어서 관광 가자 제안했어요. 그때부터 봄에 한번, 가을에 한 번, 놀러가기 시작했지.
부녀회 주축으로 봄, 가을이면 마을 이곳저곳에 산적해 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수고한 부녀회원들을 위해 설탕 한 봉지라도 꼭 쥐어줬다.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혼례를 치르면 부녀회원들과 찾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애경사를 살뜰히 챙겼다. 먹고 살기 바빠 놀러갈 틈이 없는 주민들과 함께 봄, 가을로 바람 쐬러 다녔다. 앞으로도 힘내자는 의미로 부녀회 기금으로 앞치마며 장화며 숱하게 맞춰 입고 신었다. 함께하면 할수록 부녀회원들의 우애는 돈독해졌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 마흔네 살이던 김순옥 씨가 일흔두 살이 되던 2016년, 예기치 않은 사고로 건강이 악화되어 부녀회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황선화 부녀회장이 2003년대 무렵 부녀회에서 맞춘 앞치마를 입고 최순영(사진 오른쪽),엄경자 씨(사진 왼쪽)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황선화 부녀회장은 마을에서 소문난 봉사왕으로, 1995년경 마을회관이 준공되면서부터 어르신들과 점심을 차려 같이 먹는 요리 봉사를 하기 시작해 2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르신들의 점심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왼쪽 사진).

 

“그만두게 되니까 시원섭섭했지요. 허허. 근데 부녀회는 정말 나 혼자 한 게 하나도 없어요. 고생한 부녀회원들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고마워. 부녀회원들도 그렇고 동네사람들도 그렇고 그 분들 도움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했지. 앞으로도 새 부녀회장 많이 도와주면 좋겠어요. 상처가 될 만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고 서로서로 배려해 주면 좋겠어요. 황선화 부녀회장이 봉사정신이 뛰어나서 잘할 거예요.
2016년부터 공석으로 남겨졌던 부녀회장 자리는 2019년 10월 17일 황선화 씨가 부녀회장으로 임명되며 채워졌다. 10월 25일에 첫 부녀회의를 진행한 햇병아리 부녀회장이지만 마을에 대한 애정은 누구 못지않게 뛰어나다. 황선화 부녀회장은 1년에 2회 진행하는 마을 청소며 마을 애경사 챙기기 등 부녀회가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잘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동안 김순옥 전 부녀회장님이 고생 많이 하셨죠. 저도 몸이 아프지 않는 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봉사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요. 여러분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우리 화목하고 건강하게 지내요.
황선화 부녀회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농한기인 12월에는 더 많은 부녀회원들이 모여 부녀회의를 진행하고, 꽃피는 봄이 오면 동네 사람들 모두 모여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든든하고 활력 넘치는 소향2리 부녀회가 되길 바란다.

[출처] 홍성읍 소향리 소향2리 - 사람 사는 이야기조사, 글 남지현, 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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