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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만주로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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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만주로 떠나보내며
  • 홍성신문
  • 승인 2020.05.1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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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⑦
김정헌 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탄생되었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 부사령은 이진룡이 선출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출범부터 무장 항일투쟁을 표방했다.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다. 활동범위도 국내를 넘어서 중국까지 넓혔다. 국내에서 자금과 인력을 만주로 보내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로 진격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만주지역 총책임자는 부사령 이진룡을 파견했다.
대한광복회의 가장 큰 숙제는 군자금 모금이었다. 이들의 군자금 모금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일제의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했고, 헌병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고, 일제가 운영하는 중석광산에 잠입하기도 했다.

김한종 생가(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소재)

전국의 부호들에게도 군자금 모금에 응하도록 포고문을 발송했다. 순순히 응하지 않는 친일부호들은 과감하게 처단했다. 경상도 친일 지주 장승원을 처단하는가 하면 충남 아산의 친일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이처럼 치열하게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1917년 5월 25일 만주로 파견된 부사령 이진룡이 일제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진룡은 당시에 ‘해서명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우 용감한 독립투사였다. 당장 만주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무관학교 설립 계획이 난관에 봉착했다.
1917년 8월 어느 날, 서울 남대문 밖 남문여관에 몇 명의 사내들이 은밀하게 모였다. 박상진, 김좌진, 김한종, 김재풍 등 대한광복회 핵심 요인들이었다. 남문여관 주인은 어재화라는 기생이었고, 이곳은 대한광복회 서울 거점이었다.
남문여관에 사내들이 은밀하게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다. 만주에서 체포된 이진룡 부사령의 후임으로 김좌진을 떠나보내는 송별 자리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이진룡의 후임으로 김좌진을 임명했다. 김좌진은 이미 대한광복회와 북만주에 이르기까지 청년투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에 체포된 이진룡을 대신할 적임자는 김좌진밖에 없었다. 김좌진에게 맡겨진 우선 과업은 목단강으로 가서 무관학교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송별 자리에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었다. 술잔이 한 순배가 돌아간 후에 박상진이 전별시 한 수를 읊었다.

가을 깃든 압록강 너머 그대를 보내매
(鴨江秋日送君行)
쾌히 내린 그대 단심이 우리들 서약 밝게 해 주네 (快許丹心誓約明)
칼집 속의 용천검이 홀연히 빛 발할지니
(匣裏龍泉光射斗)
이른 세월 내 공 세워 개선가 불러보세

(入功指日凱歌聲)
자리에 동석한 김한종도 전별시 한 수를 읊었다.
오늘 만주로 떠나는 그대를 전송하오니
(今日送君渡滿行)
의를 행할 칼 가을 물에 밝게 그 마음 비치도다 (劍頭秋心照心明)
뭇 정성 합친 곳에 능히 대업을 이루리니
(衆誠合處能成業)
서로 이겨 만날 때 반드시 큰 외침이 있으리라 (相克逢時必有聲)

김한종 전별시비(생가 소재)

전별시를 읊은 박상진은 김좌진과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김한종은 김좌진의 고향 홍성과 이웃한 예산 광시 출신이다. 김한종은 대한광복회 충청도 지부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박상진은 김좌진보다도 다섯 살 연상이고, 김한종은 여섯 살 연상이다.
하지만 만주로 건너간 김좌진은 몇 달 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한광복회원들의 정체가 탄로 나며 많은 회원들이 일제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남문여관에서 송별자리에 함께 했던 박상진과 김한종도 체포되었다.
김좌진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종로 구치소를 파옥할 생각이었다. 국내로 잠입하여 남아있는 광복회원들과 함께 구치소 파옥을 추진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만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김좌진은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남문여관 송별자리는 세 사람의 살아생전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공을 크게 세우고 다시 만나 개선가를 불러보자던 약속도 실현되지 못했다. 세 명 모두 조국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중국 흑룡강성 해림에서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박상진과 김한종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같은 날 교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자료출처 :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국방일보. 2019)

김정헌 작가는 구항초등학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하고 현재 내포구비문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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