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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과 해주오씨의 홍성 정착 그리고 역사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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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과 해주오씨의 홍성 정착 그리고 역사적 교훈
  • 홍성신문
  • 승인 2020.05.1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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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 월암리 해주오씨 집성촌과 제단을 중심으로
| 기고 | 오 영 택 명지대학교 교수

역사를 모르는 가정이나 민족, 국가는 절대로 강해질 수 없다. 지난 과거 속에서 교훈을 얻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서 미래로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역사적 교훈을 말할 때 경험을 하고도 모르는 ‘바보’와 경험을 하고 아는 ‘보통 사람’ 그리고 경험하지 않고도 아는 ‘현명한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경험하지도 않고 안다는 것은 책이나 역사적 교훈을 터득하여 지혜를 얻고 미래를 개척하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가 깊어 가문과 씨족을 중시한 민족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나라보다 본과 성을 따지고 지역마다 집성촌(集姓村)이 많이 형성되어있다.

그중의 하나로 우리 홍성 금마면 월암리 봉수산 아래 봉암 마사마을에는 해주오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집성촌을 이루게 된 동기와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하나의 가문 얘기가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 공감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해주오씨는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로 지금부터 3300여 년 전 중국 주나라 오태백(吳泰伯, BC. 1,284~1,194년)이 오(吳)나라를 세워 세계 오씨 시조가 되고, 중국 송나라 때 대학사인 세계 오씨 67세손인 오인유(吳仁裕)가 서기 984년(성종 3년) 고려로 건너와 군기감(軍器監) 감을 역임하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면서 해주오씨 시조가 된다. 2015년 통계청 조사기준 한국 오씨는 약 76만 명이며 성씨순위 12위이고 해주오씨는 약 46만 명으로 본관 순위 18위를 나타내고 있다.

해주오씨가 홍성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시기는 지금부터 550여 년 전 조선 초 1468년(세조 14년)이며 계기는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역모죄로 처형당하는 남이(南怡)의 옥(獄) 사건에 연루되면서부터이다. 남이 장군은 1486년 9월 세조가 승하하고 8대 예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간신 유자광의 역모 사건에 몰려 충신에서 역적으로 극형에 처형된다.

해주오씨 참판공파 중시조(中始祖)인 오백옹(吳伯雍)은 조선 7대 왕인 세조 때 남이 장군의 사위로 이조참판을 역임하다가 그해 남이의 옥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하게 된다. 이때 처형된 인원만 30여 명이고 화를 당한 부모, 형제, 숙질, 사위까지는 100여 명이나 되며 당시 관리로써 남이의 사위인 오백옹은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 봉수산(鳳首山) 아래를 길지(吉地)로 정하여 피신 낙향 정착함으로써 해주오씨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이다.

따라서 월암리 해주오씨 세거지와 해주오씨세덕단(海州吳氏世德壇), 중산골 선영(先塋) 산소 등은 5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화를 당하여 피신 정착하다 보니 화려하지는 못하다.


해주오씨 종중에서는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남양주시에 한국 해주오씨세덕단을 1890년(고종 27년)에는 홍성에 해주오씨세덕단을 설치하고 매년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홍성 ‘세덕단’ 10위 비(碑
홍성 ‘세덕단’ 10위 비(碑

단(壇)이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터로 해주오씨 종친회에서는 찾아갈 수 없거나 유실된 시조 이하 상세선조(上世先祖)의 산소를 대신하여 중앙과 지방에 설치한 것이다. 홍성 해주오씨세덕단은 중시조 이조참판 오백옹이 남이의 옥과 연루되어 화를 당하다 보니 부친과 자식 3대에 걸쳐 생(生)과 졸(卒) 연월일도 없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오백옹의 위 선조들은 5대 걸쳐 정3품 판서(장관)를 역임하고 아래 손 조카들도 정4품 3품의 관직에 오르는 등 명문 가문을 이어오나 오백옹 직계만은 남이장군이 복구될 때까지 400여 년은 초라하게 은거하며 지낸다. 그런데 남이 장군은 화(禍)를 당한 후 350년 뒤인 1818(순조 18년)에 관작(官爵)이 복구되어 왕으로부터 병조판서 충무(忠武) 시호(諡號)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산소도 없고 제사도 못 지내던 이조참판 오백옹도 남이 장군 관작 복구 후인 1890년(고종 27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홍성에 13세 오백옹과 그의 부친 12세 오완(吳浣) 내외분의 제사를 지낼 해주오씨세덕단을 건립하고 매년 제례를 올리고 있었다. 이후 50년 후인 1940년에는 위대 조상까지 10위의 비를 추가로 세우고 단을 증수하여 지금까지 제를 올리고 있으며, 이번에 금마면장(한광윤) 외 유지들이 뜻을 모아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곳이 월암리 해주오씨세덕단이 된다.

홍성 해주오씨세덕단은 단순히 해주오씨 가문의 역사적 사실뿐만이 아니라 난을 평정하고 건주 여진족을 토벌하여 충신이 된 남이 장군이 임금(정권)이 바뀌자 신하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충신에서 역적으로 변하는 냉혹한 역사적 사실과 또한, 나중에는 진실이 밝혀져 관작이 복구되는 등 진리는 이긴다는 역사교육의 장이 된다. 아울러 조상을 잘 모시고 효를 실천하면 후손 만 대까지 행복과 번영이 함께한다는 교훈을 함께 주고 있다.

홍성의 해주오씨 근세 인물로는 홍주향교를 목숨으로 지킨 의사 오경근(吳景根, 1846~1894)과 홍성이 나은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정부인 오숙근(吳淑根, 1887~1958) 여사를 들 수 있다.

홍주향교/ 칠의비 비각(碑閣)

해주오씨 25세 의사 오경근은 1984년 동학 난 때 공비들이 홍주향교에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울 때 이들에게 끌려 불에 태워죽임을 당함으로써 홍주향교를 지킨홍주 7 의사의 한 분으로 비와 현판이 홍주향교에 있으며매년 홍성군에서 제를 오리고 있다. 해주오씨 25세 오숙근여사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서 태어나 18년을그곳에서 살다가 김좌진 장군과 결혼하고 홍성으로 와서장군의 부인으로 우리나라 개화기, 일제 강점기 역사와 같이하면서 안성, 홍성, 중국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파란 많은생애를 살게 되는 부창부수, 여필종부, 현모양처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오숙근 여사의 생가지인 경기도 안성의 해주오씨 집성촌 덕봉마을은 해주오씨 가문 중 가장 많은 인재로 문과 급제 18명, 무과급제 107명, 음서 143명을 배출한 명문 가문이며 이 마을에는 정무공 오정방 고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충신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경기도 유형문화재 8호) 외 해주오씨 재실, 경모재, 숭문각, 천덕정, 덕파루, 신도비, 봉선문, 오숙근 여사 생가지 등이 있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아 선비체험을 하는 등 유서 깊은 역사문화 체험 마을이다.

이 마을의 덕봉서원(德峰書院)은 1697년에 숙종임금이 ‘덕봉(德峰)’이라고 사액(賜額)된 서원으로 지명도 덕봉리가 되었다.

홍성이 나은 민족지도자요 독립운동가인 김좌진 장군의훌륭함 뒤에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뒷바라지해온 해주오씨 최고 가문의 오숙근 여사가 계셨음을 상기하면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널리 홍보하고 기억하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전국 지방 각지에는 크고 작은 집성촌들이 많다. 어느 곳이든 집성촌을 이루기까지는 연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발굴하여 알아보고 역사적 교훈을 공부하는 것은 선진 문화인으로 좋은 기회라 여겨진다.

하나의 예로써 우리 홍성 봉수산 아래 월암리 해주오씨 집성촌과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설치하고 효를 실천하는 해주오씨세덕단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같이 공감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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