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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신문
  • 승인 2020.04.2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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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 소향리 소향2리 - 마을 톺아보기 ①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아가는 마을

홍성읍 소향리 소향2리는 홍성읍 최북단으로 흥북읍 중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홍성읍 대교리, 서쪽으로는 홍성읍 월산리, 남쪽으로는 홍성읍 오관리, 북쪽으로는 홍북읍 중계리가 있다. 마을 남서쪽에는 2000년 10월 준공, 2001년 1월 개관한 족구장, 테니스장, 양궁장, 게이트볼장, 체육센터 등으로 구성된 홍주종합경기장이 있다. 총 부지는 9238m2이며 1만5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소향2리 1반 전경

소향2리는 한국전쟁을 피해 홍성역 근처 피난민수용소에 거주하던 피난민들을 1953년 60세대, 1955년 100세대를 이주시켜 형성된 마을이다. 당시 7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이주했고, 1958년 미군 구호물자 배급이 끊기면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살 길을 찾아 상경하거나 헤어진 가족을찾아 외지로 떠나고 홍성 원주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출산 감소와 고령화, 거주지 이동으로 서서히 인구가 줄어현재는 총 77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 귀농가구 2가구, 귀촌가구 6가구, 혼자 사는 가구는 9가구다. 전체인구는 239명이고 여성은 128명, 남성은 111명이다. 소향2리 여성 최고령자는 1929년생 전영순, 이영예 씨며, 남성 최고령자는1932년생 윤명천 씨다.

주요 경제활동은 농업, 직장 생활, 자영업 순으로, 농업이 약 50%, 직장 생활이 약 30%, 자영업이 20%를 차지한다. 농지 면적은 120,193m2의 논과 59,132m2의 밭, 29,537m2의 과수원이 있다. 1960년대 소향2리 농업 종사자의 약 90%가 땅콩 농사를 지었다. 1980년대 초 땅콩 수매 가격이 떨어지며 소득이 저하돼 작목 능가가 줄어들었고, 땅콩보다 수고로움이 들지만 그만큼 수익이 되는 고추, 들깨 등을작목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현재도 고추, 들깨, 고구마가 주 작목이다. 과수로 유명한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아 과수를 심어 파는 농가도 많았다.

1960년대 초반 20여 가구의 농가가 사과, 배, 복숭아 등의 과수를 경작하다 고령화로 인해 1990년대 말부터 줄어들어 현재는 3가구가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에서 6, 7가구 정도가 축산에 종사했는데 주로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양계를,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양돈을 했다.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자주 들어오고 읍사무소에서 축산업 지양을 장려해 점차 키우지 않게 되었다. 현재 김복만, 이광복, 정진흥, 우명희 씨가 100두 미만의 소를 키우고 있다. 그 밖에 이득신 씨가 방울토마토 농사를, 이재선 씨가 딸기농사를 짓는다.

60세대 모습. 한 집, 두 집, 세 집, 네 집, 다섯 집… 이렇게 10세대를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들이 한 동씩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 정진흥 씨 그림
60세대 모습. 한 집, 두 집, 세 집, 네 집, 다섯 집… 이렇게 10세대를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들이 한 동씩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 정진흥 씨 그림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또 다른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하고 당시 강한 힘을 가졌던 국가들에 의해 우리 민족은 국토와 이념이 나뉘게 되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이북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땅을 전부 빼앗고 내쫓아 국유화하는 몰수정책이 진행되고 있었다. 땅을 모두 빼앗긴 이북의 지주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 땅도, 고향도, 살림도 모두 내버린 채 식구들과 함께 남한 전국 각지로 피난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끝내 터져버린 한국전쟁, 그리고 1953년 7월 북한과 남한의 분단을 남긴 채 전쟁은 휴전상태에 이른다. 남한으로 내려왔던 북한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며 정착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남한 사람들 또한전쟁이라는 비극 후 비참한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 속 충청남도 홍성 역전에는 피난민들이 머무르며 생활할 수 있는 수용소가 있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배고픔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피난민들의 정착을 돕고 삶을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지 궁리하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난민정착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홍성에서는 국유지였던 소향2리 땅을 피난민정착지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10연동 연립주택 6채를 지어 역전 수용소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켰고, 다음으로 2연동 연립주택을 50채 지어 100세대를 형성해 총 160세대가 입주를 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유엔 한국 재건단(UNKRA)에서는 굴뚝이나 지붕 등을 만들 수 있는 주택 자재들을 지원해 주었고, 기독교 봉사, 카톨릭 구조위원회, 적십자회 등에서 밀가루, 강냉이가루, 우유 같은 식량을 지원했다. 사람이나 차가 다닐만한 길도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구호물자를 실어 오는 차가 동네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들이 직접 물길에 배수로 치고 손수 길을 닦았다고 한다.

 

1956년 60세대 풍경을 뒤로 한 정진흥 씨의 여동생과 정진흥 씨의 모습.

 

1956년 60세대 풍경을 뒤로 한 정진흥 씨의 여동생과 정진흥 씨의 모습.

 

서언순 : 집 모양이 전부 똑같으니까 나왔다 들어가려면 남의 집으로 많이 들어갔지. 집 지을 때 처음에 지붕은 수수깽이로 엮어서 모양 맨들어서 나래를 없었어. 그때 구녕이 조금씩 있으면 흙으로 지붕 꼭대기를 싹 발러주고 비 새지 말라고 용구새를 올려주는 거야. 난중에는 함석 스레트로 바꿨지.

정진홍 : 친구들 무지하게 많았지. 그때만 해도 한 집에 보통 부부에다가 애덜 1~2명 있으니까 얼추 네 식구는 되겠고, 60가구가 네 식구씩만 해도 인구가 얼마나 많겠어. 애덜이랑 도둑놈 잡기도 하고 자치기, 술래잡기, 자석치기 이런 거 많이 했지. 고생을 해도 그때는 그런대로 정이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싸우면서도 단합도 되고 그런 점이 있었죠.

신영화 : 구호물자에 목재 이런 게 나왔는데 미국 원조기관에서 나온 것 같어. 미송 각재. 그거 가져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2세대를 한 지붕 아래 양쪽에 지으라고 했어. 시멘트고 뭐고 없고 이엉 엮어서 흙 발라서 집 다 지었지.

정부 시책으로 피난민들에게 1세대 당 3000평의 토지를 배분해 농경지로 개간하여 먹고 살 기반을 만들도록 장려했다. 거주공간과 농토는 마련되었지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배분받은 토지는 개간이 불가능한 곳까지 포함되어 있어 경작 가능한 농토는 1000여 평도 되지 않았다. 어찌어찌 개간해도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곡식을 심어도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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