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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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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④
  • 홍성신문
  • 승인 2020.04.11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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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을 감동시킨 홍주목사 홍기섭(洪耆燮)

우리고장 홍주읍성 홍화문 앞에는 조선시대 홍주목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군이 두 곳 있다. 홍주읍성의 남문인 홍화문 바로 앞에는, 조선시대 421대 홍주목사를 역임한 홍기섭(洪耆燮)을 기리는 비가 있다. 옛날 홍주성을 수리했던 내용을 기록한 ‘수성기적비’ 바로 옆에 서 있는 비다.

홍주목사 홍기섭의 젊은시절 일화가 명심보감(明心寶鑑) 염의편(廉義篇)에 소개되고 있다.

명심보감 염의편은, “洪公耆燮(홍공기섭), 少貧甚無聊(소빈심무료)…”로 시작된다. 명심보감 염의편 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홍주목사 홍기섭 선정비

홍기섭은 젊었을 때 몹시 가난했다. 어느날 아침에 어린 계집종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돈 일곱 냥을 바치며 말했다. “이것이 솥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쌀을 몇 섬이나 살 수 있고, 나무도 몇 바리를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홍기섭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이것이 어찌된 돈이냐?”
계집종은 돈이 솥 안에 들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홍기섭은계집종의 설명을 듣고 나서,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시오.’
하는 글을 대문 앞에 써서 붙여 놓았다.

얼마 후에 유가(劉哥)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대문 앞에 써놓은 글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홍기섭은 유가의 질문에 사연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유가가 말하기를,
“이치로 보아 남의 솥 안에 돈을 넣고 잃어버리는 사람은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왜 취하지 않으십니까?”
“내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갖겠는가?”
홍기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때 갑자기 유가가 엎드려 말하기를,
“소인이 어젯밤에 솥을 훔치러 왔었습니다. 집안 형편이너무 어려운 것 같아서 솥 안에 엽전을 넣어두고 갔습니다.지금 나으리의 청렴에 감동하여 제 양심이 저절로 우러나와 도둑질을 아니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항상 나리를 옆에서 모시기 원하오니 염려마시고 취하소서” 했다.

홍기섭이 곧장 돈을 돌려주며 말하기를,
“자네가 착하게 된 것은 좋으나 이 돈은 취할 수 없다”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뒤에 홍기섭은 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 재룡(在龍)은 헌종(憲宗)의 장인이 되었다. 유가 또한 신임을 얻어 몸과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이상이 명심보감 염의편에 나오는 홍기섭 일화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홍주목사를 지냈던 홍기섭의 일화가 구전설화로 전국에 흩어져서 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기섭과 도둑 이야기가 조선후기 야담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 1920년대에 지은 「대동기문(大東奇聞)」과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에 전해 오며, 후세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 학교현장 등에서 학생들의 정직과 관련된 훈화자료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화이기도 하다.

홍주읍성 비석군

홍기섭 일화는 다양한 내용으로 변형되어 전해온다. 어린 계집종 대신 부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훌륭한 일화를 간직한 홍주목사의 선정비가 우리고장 홍성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홍기섭은 제421대 홍주목사를 역임했으며, 1840년 8월에 홍주목사로 부임한 기록이 있고, 재임기간은 확실한 자료가 없다. 홍기섭은 1781년(정조5)에 태어나서 1866년(고종3)에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조선후기 문신과 학자였으며, 자는 수경(壽卿)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840년(헌종6)에 홍주목사, 1850년(철종1)에 황해도 관찰사, 1853년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김정헌 작가는 구항초등학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하고 현재 내포구비문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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