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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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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③
  • 홍성신문
  • 승인 2020.03.2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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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으로부터 마을을 구한 차 효부

김정헌 작가는 구항초등학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하고 현재 내포구비문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차효부의 전설이 전해오는 느티나무

요즘 우리나라 전체가 코로나19로 겪는 고통이 참으로 극심하기만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옛날 충청도지역의 전염병 창궐 사례가 여러 번 기록되어 전해온다.

1526년(중종 21년) 3월 4일 기록에는, 충청도에 여역으로 사망한 사람이 내포지역 주변에만, 홍주 36명·해미 59명·보령 52명·덕산 33명 등이다.

3월 8일 기록에는, 온양 7명ㆍ아산 3명ㆍ예산 6명ㆍ서천 10명ㆍ결성 1명 등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이날 기록에 보면, 도내 다른 지역까지 합쳐서 모두 1백22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3월 16일 기록에는 결성 3명·홍주 13명ㆍ보령 16명ㆍ덕산 1명 등이, 내포지역 인근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아마도 이해 3월에는 충청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백성들이 사망했던 것 같다.

1554년(명종 9년) 5월 12일에도 전염병 기록이 전해온다. “청홍도(淸洪道, 당시 충청도 이름임) 홍주(洪州)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4백44명이 죽었고 앓고 있는 사람도 6백 21명이나 되었다”
1625년(인조 3년) 3월 5일에도 전염병 기록이 전해온다. “충청도 충주ㆍ홍주ㆍ보령ㆍ황간 등지에 여역이 크게 퍼져 죽은 사람이 각각 70여 인씩이나 되었는데,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의원과 약을 보내 구료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요즘 코로나19로 고통받는 현장에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고군분투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지역에서 과거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어떤 의인들이 있었을까?

우리고장 결성에서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했던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홍성군 결성면 성남리에 가면 ‘중리(中里)’ 마을이 있다. 중리 마을로 접어들기 전에 길 왼편 아래쪽으로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이었고 서낭당 터였다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재리(守災里) 나무로유명한데, 차씨(車氏)라고 부르는 여인의 감동적인 사연이 아름답게 전해오는 나무이기도 하다.

중리 마을은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천수만으로 이어지는 바닷가 마을이었고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포구였다. 마을 한쪽에는 나라에서 세금으로 받아들인 세곡을 보관해두는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창말포구(蒼末浦口)’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옛날에는 마을이 포구였던 관계로 일감도 많았고 찾아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마을사람들이 한둘씩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앓아눕는 것이었다.


포구를 따라 들어온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집마다 전염병으로 눕거나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갔다. 마을은 밀려드는 전염병에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무방비 상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염병을 피해서 마을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느티나무 밑동 모습

마을에는 차씨(車氏)라고 부르는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댁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남편과 아들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시어머니와 딸과 시동생은 드러누워 있었다. 집에서 몸이 성한 것은 차씨 혼자뿐이었다. 포구는 폐쇄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씨에게도 빨리 마을을 빠져나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차씨는 전염병에 걸려 누워있는 식구들을 남겨두고 혼자 피할 수가 없었다.

“제가 누워있는 식구들을 버리고 어찌 피난길을 떠나겠습니까? 이 댁으로 시집올 때 부모님께서는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제가 집을 떠나면 어느 누가 식구들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떠다드리겠습니까?”

차씨는 이웃들의 권유를 끝까지 거절했다. 이웃들은 하는 수없이 차씨를 남겨두고 마을을 떠났다. 이제 마을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오직 차씨 혼자뿐이었다.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여기저기에서 시체 썩는 냄새만 진동했다. 차씨는 누워있는 식구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집집마다 누워있는 이웃집의 전염병 환자까지 보살폈다. 병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시신을 거두어서 매장해 주었다.

차씨는 정신없이 환자들을 보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몇 달이 흘렀다. 차씨가 혼자서 마을을 지키는 동안, 맹렬하던 전염병의 기세도 꺾이기 시작했다. 차씨의 지극한 정성으로 드러누웠던 가족들은 전염병을 이기고 일어났다. 전염병을 이겨낸 사람들은  이웃들도 여러 명 있었다.

전염병이 물러간 후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이웃들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피난 갔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씨의 살신성인적인 마음과 행동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만 살자고 피난 갔던 행동이 부끄럽기만 했다. 마을은 악몽에서 깨어났고 포구도 다시 개항 되었다.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차씨의 선행이 여기저기로 알려진 것은 물론이었다.

때마침 마을에 찾아온 관리가 이 사실을 알고 한양에 보고했다. 임금님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기뻐하며, ‘차효부(車孝婦)’라고 부르도록 하였고, 많은 하사품을 전달했다.

차 부인의 선행과 전염병에 관련된 흔적들은 마을 여기저기에 지명으로 남아서 전해오고 있다. 차효부가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집이 있었는데, 이곳을 ‘도당(禱堂)뿌리’라고 부른다. 임금님의 하사품을 싣고 온 관리가 배에서 내린 곳을 ‘승지골’이라고 부른다.

또한 임금님의 명을 받들고 찾아온 승지는, 차 부인의 감동적인 사연을 오래오래 기리고자 마을 입구에 나무 한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가 바로 지금의 느티나무인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300여 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나무 아래서 제를 지내며 차 부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차 부인과 관련된 기록도 묘소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 외롭게 서있는 느티나무 혼자서, 오가는 이들에게 차 부인의 행적을 말없이 전해 주고있을 뿐이다.

(출처 : 1) 김경수 편저, 「조선왕조실록 속의 홍주군ㆍ결성현 이야기」, 청운대학교 인문ㆍ사회과학연구소/홍성문화원, 2004년. 2) 김정헌, 「삶과 상상력이 녹아있는 우리동네」, 홍성문화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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