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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홍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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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홍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 홍성신문
  • 승인 2020.02.09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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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② 마지막 연초 농군
임응순 씨의 모친 김기준 씨가 담뱃잎 목 짓는 일을 하고 있다. 담배 수확의 첫 걸음인 셈이다. 이렇게 목 지은 담뱃잎은 꺼치(포대)에 담는다. 한 포대의 무게는 대략 25~30kg이다.
임응순 씨의 모친 김기준 씨가 담뱃잎 목 짓는 일을 하고 있다. 담배 수확의 첫 걸음인 셈이다. 이렇게 목 지은 담뱃잎은 꺼치(포대)에 담는다. 한 포대의 무게는 대략 25~30kg이다.

상유정마을에서는 주민들 대부분이 1970~80년대 담배농사를 지었다. 어떤 가구는 몇 년 짓다가 말기도 하고, 어떤 집은 지금까지 짓고 있기도 하다. 담배농사를 그만 둔 가장 큰 이유는 힘들어서다.

사람 손도 많이 가는데 지금은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고, 담뱃잎에서 나는 냄새를 오래 맡으면 현기증도 나며, 가장 더운 시기인 7월에 담뱃잎을 수확하고 손질해야 함은 물론이고, 고령화로 몸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담배를 부르는 명칭은 많았다. 조선에서는 남초(南艸), 연다(烟茶), 연이라고 불렀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해동농서’에 따르면 담배는 여송국(동양에서는 필리핀을 여송국이라 불렀다)에서 생산되어 중국에 유입된 것은 1600년대 무렵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담배를 얻었는데 남쪽 오랑캐가 가져온 물건이라 하여 ‘남초’라 불렀다. 일부 시골에서는 ‘담파고’라 불렀는데 이는 ‘타바코’라는 포르투칼어가 변형돼 일본인들이 ‘담바고’라 불렀고, 조선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됐다.

담배의 역사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불분명하다. 어떤 이는 중국을 거쳐 일본에서 들어왔다고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떠한 경로를 거쳐 들어왔던 간에 농부의 땀으로 지어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시대 문인 이 옥(李鈺, 1760~1815)이 1810년에 저술한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은 그야말로 담배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저술이다. 이옥은 ‘연경’에서 담배 재배방법,담배의 성질과 맛, 담배를 피우는데 사용되는 각종 용구, 흡연의 품위와 문화 등을 다루고 있다.

이밖에도 1910년 탁지부 임시재원조사국에서 연초의 재배·제조·판매·소비등에 관한 일체의 사실을 조사하여 작성한보고서인 한국연초조사서(韓國煙草調査書)에도 담배의 재배 방법, 연초제조의 상황, 엽연초·각연초 및 제조연초의 산매상황, 생산·소비, 수입연초의 월별비교표를 수록하고 있다.

이 씨가 비닐하우스에서 담뱃잎이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이 씨가 비닐하우스에서 담뱃잎이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이옥은 ‘연경’에서 담배 재배 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하며 “서울 사는 귀족집 자제들은 그저 담배를 피울 줄만 알지, 담배씨를 뿌리고 잎을 거두며 뿌리를 복돋고 키우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과정을 전혀 모른다. 그러고서야 옥같이 귀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곡식을 경작하고 수확하는 어려움을 모르는 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담배의 씨를 뿌리고 뿌리를 복돋고 키우는 방법을 다른 것에 앞서 기록하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알려주려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담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농산물이 씨를 뿌리고, 잎이 자라고 열매를 맺어 수확하기까지 농부의 손길을 거친다. 담배 애호가들이 피는 담배에도 농부의 땀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비록 그 존재가 미미하다고 생각되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다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으며, 이를 가꾸고 기르는 사람들의 노고가 있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담배를 심는 사람들을 ‘연초 농군’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굳이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지만 상유정마을에는 마지막 담배농사를 이어가는 임응순 씨와 가족들이 있다.

임응순 씨와 부인 장영희 씨, 임 씨의 모친인 김기준 씨가 2000평의 담배농사를 부친의 뒤를 이어 80년째 짓고 있다. 임응순 씨는 젊은 시절 잠시 외지에 나갔다가 20대 초반 다시 고향에 돌아와 부친인 故 임기재 씨와 담배농사를 이어간 연초 농군이다.

“담배농사 짓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인력 구하기도 어렵다. 내년에는 가족이 지을 수 있는 만큼 줄일 생각이다. 아마도 우리 대에서 이 농사도 끝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담배는 버어리종이다. 버어리종이 보급되기 전에는 황색종, 일명 노랑초를 재배했다. 노랑초는 건조장에서 연탄이나 석탄을 이용해 불을 피워 말려야 했다. 건조과정이 까다롭고, 비닐하우스가 널리 보급되면서 버어리종을 생산한다.

김기준 씨는 “예전에 담배를 말릴 때는 지금처럼 비닐하우스가 없으니 나무 말뚝을 네 군데 박아서 철사줄로 매서 담뱃잎을 말렸다. 낮에는 햇빛에 말리고 비를 맞으면 안 되니 밀대방석으로 덮어놓고는 했다”고 회고한다.

담뱃잎을 묶는 일을 ‘목’짓는다고 한다. 담뱃잎을 목 지어서 하얀 끄냥이(전매청에서 공급하는 일종의 끈)로 규격대로 한 포, 두 포 씩 포장한다. 이를 ‘하꼬’라고 부른다. 한 포의 무게는 대략 25~30kg이다. 담배꺼치(포를 짓는 나무 틀)에 담뱃잎을 네 켜까지 쌓은 뒤 나무판으로 누른다.

현재는 연엽초조합에서 제공하는 포대에 담는다. 잘 건조된 담뱃잎은 1등품에서 등외품까지 분류한다. 흠집이 없이 붉으스름하고 길이가 긴 것이 최상품이다. 포장된 담뱃잎은 예산연엽초생산조합에 납품한다. 예산연엽초생산조합에 납품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 전이다. 그 전에는 결성, 광천, 홍성에 납품하다가조합창고가 없어지면서 예산에 납품한다.

마을에는 담배농사를 총괄하는 책임자인 ‘총대’가 있었다. 총대는 연엽초생산조합에서 보조되는 비료, 퇴비 등을 관리하고 주민들에게 배부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편 마을에서 담배농사를 가장 많이 지었던 집은 임대순 씨다. 20년 동안 4500평의 담배농사를 지었던 임 씨는 이러다가는 부인이 다 죽겠다 싶어 담배농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담배를 말릴 때 비닐하우스도 모자라 구옥 서까래에 못을 박고 새끼줄을 엮어 담뱃잎을 말렸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으니 담배농사를 이어갈 사람도 없다. 이러다가 수입산 담뱃잎이 담배시장을 점령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연초 농군의 어깨가 새삼 무겁게느껴진다.

[출처] 홍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조사, 글 김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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