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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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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 ①
  • 홍성신문
  • 승인 2020.02.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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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네들의 땀으로 짜낸 삼베

상유정마을의 역사와 유래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신정리는 본래 홍주군 대감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동, 계정리, 상유정리, 하유정리, 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해 신동과 유정의 이름을 따서 신정리라 해 홍북읍에 편입됐다.

상유정마을은 마을 앞산인 탬봉 주변에 칡이 많았다 하여 ‘칡대비’라고 불렀다. 1942년생 임기순 씨에 따르면 상유정마을과 하유정마을 중간에 있는 논을 벤다리논이라 부르는데 예전 바닷물이 갈산리 앞으로 흘러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 물은 삽교천으로 흘러가는 물길이었으며, 예전 어르신들에게 들은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또한 마을 서쪽에 위치한 제룡산에 무속인이 거주하면서 서낭당이 있었는데, 무속인이 사망하면서 서낭당도 사라졌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제룡산에 곱돌을 캐다가 곱돌을 갈아 다마를 만들거나 땅에 그림을 리고 놀았다고 한다.


상유정마을의 입향조는 풍천임씨 운초공파로 11대조인 임경지(1598~1636)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풍천임씨 11대손이며 풍천임씨 종친회 임기순 회장에 따르면 지난 2009년 흩어져 있던 풍천임씨 묘소를 연봉산에 이장해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추모비 옆에는 임명호 공적비가 있다. 운초공파 10대손 임명호는 1909년 가옥에 화재가 나자 조상의 얼이 담긴 족보를 구하기 위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사망했고, 그 후손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세워졌다. 풍천임씨 종친회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내 8~90%가 풍천임씨였지만 현재는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한편 마을에는 구씨 부자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성본’이라는 천석꾼이 마을에 거주했는데 그 자손들이 외지로 나가 생활하면서 부유하게 살다가 한국전쟁 이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1980년경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1988년 임대순 씨가 구씨 부자가 살던 가옥을 매입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이며, 전화가 들어온 것은 1983년 무렵이다.

삼베는 무명, 모시, 명주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 직물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1490년에 펴낸 ‘조선부(朝鮮賦)’에서 ‘포이직마(布而織麻)’, 곧 조선의 포(직물)는 마로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베는 대마(大麻)를 재배해 껍질을 벗겨 가늘게 째서 실로 만들어 여러 공정을 거친 후에 베틀에서 짠 직물이다. 일반적인 삼베 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봄이 되면 대마 씨를 뿌린다. 삼베 밭은 여름철 기온이 높고, 습기가 조금 있으며, 배수가 잘 되는 곳이 적합하다. 삼이 2m가량 되면 삼베기를 한다. 베어낸 삼은 삼굿에서 삶는다. 삼굿은 대마 줄기에서 섬유를 얻기 위해 수증기로 찌는 공정을 말한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철로 만든 대형 솥을 올린다. 그 위를 멍석으로 덮고, 흙을 발라 수증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한다. 보리짚과 나무 등을 넣고 불을 때 삶는다. 수증기가 올라오면 삼이 익었다는 신호다. 이 때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을 넣어 함께 삶아 먹기도 했다.


임대순 이장은 “마을에 삼을 쪄 주는 집이 있었다. 삼을 찌려면 그이에게 돈을 주고 삼을 쪄야 했다. 인근 신가리에서도 우리 마을로 삼을 찌러 왔었다”고 말한다.

삼을 삶은 뒤 잿물에 한나절 담가 까만 물을 빼내고 누런색이 나오게 한다. 색이 나오면 삼을 말린다. 말린 삼은 칼로 껍질을 벗겨낸다.  벗겨낸 삼은 훑어내 삼의 가장 바깥층을 벗겨낸다. 벗겨낸 삼을 이빨이나 손톱을 이용해 쪼개서 굵기를 일정하게 만든다. 일정한 굵기로 째야 했던 이 과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도구가 삼 째는 도구다. 나무를 십자모양으로 연결한 뒤 그 끝에 바늘을 달아 사용했다. 삼을 짼 후 삼 가닥을 허벅지에놓고 침을 묻혀가며 삼을 잇는다. 이를 삼삼기라고 한다. 삼은 삼을 물레를 돌린다. 물레에 돌려 실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 물레의 토생이에 감아 놓고, 다시 물레를 돌려 삼을 꼬고 토생이에 감는 작업을 반복한다.

상유정마을 부녀자들 대부분은 삼베와 모시를 짜서 생계를 이어갔다. 논농사와 밭농사 이외에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베틀에 앉았다. 친정에서 배우지 못한 새색시는 시집을 오자마자 가장 먼저 시어머니에게 배운것이 삼베 짜는 법이었다.


김선분 씨는 “시집 와서 시어머니에게 배웠지. 시어머니가 하라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고 뵜지”라고 말한다.


스물세 살에 홍성읍 내법리에서 시집 온 임경애 씨는 시집 온 이듬해부터 삼베를 짰다고 한다.
“삼베를 말린 후 가닥가닥 째. 삼이 새까마니 색을 뽀얗게 내기 위해 바래(햇빛에 말린다는 뜻). 바래면 손톱으로 삼을 째. 째는 게 보통 힘든 것이 아녀. 가늘게 째는 것이 제일 어려워. 짼 삼을 가닥가닥 다시 여서(가닥가닥 잇는다는 뜻). 여선 것을 잿물에담았다가 삶아. 삶은 것을 다시 풀러 말려.잘 마른 삼을 베틀에 넣고 짜는 거야.”

임경애 씨가 사용했던 베틀은 서천에서 20만원을 주고 사 온 것이다.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세월의 더께를 입고 놓여있다. 마을의 다른 집들도 거의 대부분 서천에서 베틀이나 도구 등을 사다가 삼베와 모시를 짰다.


아낙네들은 보통 한 달에 100자에서 150자 정도를 짰다. 모시와 삼베를 짜는 방법은거의 비슷했는데 다만 모시는 삶지 않고 벗겨서 사용했으며, 삼베를 손톱으로 짼 반면 모시는 이빨로 쨌다. 그래서 모시를 오래 짠아낙네들의 이빨은 누렇게 변색되고 빨리치아가 빠졌다.


지금도 오래전에 짜 둔 15자 삼베를 간직하고 있는 김숙자 씨는 조카며느리의 도움을 받아 잿물에 담가 말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의 도움 없어도 혼자 힘으로 척척 해냈던 길쌈도 이제는 허리가 아프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어렵기만 하다.


깜깜한 밤, 노란 호롱불 아래 탁, 탁, 탁, 베틀을 짜는 아낙네의 눈과 손과 발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하던 아낙네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삼베다.


한편 사라지는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삼베굿을 열었다. ‘농촌에서 시작하는 생활창작소’는 천연염색, 그림, 뜨개질, 재봉, 원예치료 등을 하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30대~60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창작소다.


천연소재로 수세미를 만들며 주변 사람들과 나누던 류승아 씨는 천연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마끈이 중국산이라는 사실을 접하고 국산 황마와 대마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마에 관해 알아보면서 삼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예산에서 삼베 짜는 과정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를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삼굿잔치를 열었다.”

류 씨는 50평 밭에 대마 씨를 뿌렸다. 수확한 대마를 지난 7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삼굿을 진행했다. 아직은 서툴고, 조금은 부족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은 오래 기다리는 일이기에 어렵고 고된 일이다. 사라져가는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젊은이들의 노고가 빛이 나는 순간이다.

[출처] 홍북읍 신정리 상유정마을 - 마을톺아보기조사, 글 김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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