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면에서 딸기 농사를 처음 짓게 된 것은 1969년 무렵 거산리 ‘임신복’이라는 이가 딸기를 심으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임신복은 내남마을 최기태 씨의 처남으로 내남마을에서 딸기 농사를 지은 첫 주민이기도 하다.
그 당시 ‘보교’라는 종자를 가져와내남마을에서도 80~90%가 딸기 농사를지었다. 딸기는 서울 영등포나 용산에 있는 상회에 납품하다가 가락시장이 생기면서 이곳에 납품했다. 직접 납품하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광천으로 가서 기차 편에 실어보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이 소포장 시대가아니었던 시절에는 나무상자에 신문지를깔고 8kg씩 포장했다. 은하면 딸기가 맛에서 특히 뛰어났던 이유는 다름 아닌 논 딸기였기 때문이다.
내남마을에서 처음 딸기를 심기 시작했을 때는 논두렁에 심었다고 한다. 이후 좀 더 많은 수확을 내기 위해 가을이 되면 벼를 서둘러 수확하고, 논에 딸기를 심었다. 철제가 흔하지 않던 시절, 서산 해미에 가서 대나무를 사 가지고 와서 대나무를 짚으로 마주 묶고 비닐을 친 뒤 딸기를 심었다.
다시 벼농사를 지을 때가 되면 대나무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딸기를 심는 과정을 반복했다. 현재는 이연복, 장도자, 최기태 씨 3가구만이 딸기 농사를 짓는다. 이 중 최기태 씨만 하우스 딸기를 짓고, 두 가구는 아직도 논 딸기를 심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현재는 논농사를 아예 짓지 않고 논을 묵혔다가 딸기만 심는다.
2017년까지 딸기 농사를 지었던 정지욱 이장은 “일종의 이모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970년대에만 해도 그때가 내가 광천고 다닐 때였는데 논두렁에 딸기를 심었다. 딸기를 수확하고 나서는 딸기 넝쿨을 베어 논에 퇴비로 활용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시골마다 풀을 베어 퇴비장을 만들어 잘 활용한 마을에 상도 주고 그러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구부러진 허리로 혼자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장도자 씨는 한때 딸기 농사를 지어 집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 딸기를 지은 건 우리 시아버지(故 최용섭)였지. 기태 씨가 딸기 농사를 지으니 괜찮다고 해서 딸기를 졌는데 첫 해는 그냥 그랬어. 근데 두 번째 농사짓고 나서부터 수익이 되더라구. 그 때 우리 시아버지가 일일이 들고 나는 장부를 적었는데 장부 적으면서 누가 볼까 무섭다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 딸기 농사로 한 해 300만원 벌어서 이 집 지었다니까.”
1월부터 수확하는 논 딸기는 서산에 있는 상회에 납품한다. 요즘은 고설재배로 딸기를 재배하는 과정이 쉬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딸기넝쿨을 유인하고, 잎을 따주는 일은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내남마을의 가을은 황금들판이 아닌 달콤하고 새콤한 딸기향이 퍼지는 들녘이다.
[출처]
은하면 학산리 내남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 ② 논 딸기, 그 기억의 풍경 | 작성자 홍성지역협력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