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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청 오관리시대 500년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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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청 오관리시대 500년 이력서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9.12.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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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만에 건물, 공무원, 조직 수십배 키워

 

홍성군청 이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오관리 98번지 홍성군청의 이력서를 살펴봤다.
홍성군은 1925년에 간행된 일본어판 홍성군지를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해 출판했다. 거기에 군(郡)의 연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홍주는 옛날에 해풍(海豊), 홍양(洪陽) 등의 명칭이 있었는데 어느 시대에 쓰였는지 자세하지 않다. 고려시대 1195년 운주(運州)로 불렸으니 백월산 아래 곧 해풍현(海豐縣) 옛 터에 주관아를 새웠다.”
2002년판 홍성군지 ‘홍주대관’에 “해풍현은 고려 때의 현으로서 993년부터 202년 동안 그 관사는 홍성읍 월산리 관청재 부락에 있었다고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홍성군청은 원래 월산리에 있었던 것이다.
1925년판 군지의 ‘군청 소재지’ 편에는 “옛 읍지(邑誌)를 보면 화재를 당해 성 북쪽으로 옮겨 세웠다가 50년 뒤에 옛 터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의 홍주면 오관리 98번지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군청이 언제 월산리에서 오관리 98번지로 옮겨왔는지 알만한 기록이 없다. 홍주목사가 집무한 사달정은 1529년부터 1678년까지 150년 간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이때 부터라고 본다면 지금부터 491년 전이다. 오관리 사달정에서 업무를 수행한 홍주목사는 약 152명에 이른다. 사달정은 뒤에 정사당(政事當)으로, 안회당으로 바뀐다. 안회당은 1870년 1월 10일 3024평 대지에 상량식을 올린 46평의 기와집이다.
1895년 홍주군으로 승격되고 1914년 3월 1일 일제의 전국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결성군과 합쳐서 홍성군으로 이름 붙였다. 1919년 안회당에 군수실 18평을 중축해 사용하다가 뒤에 안회당을 가로막고 108평 목조 기와집으로 신축했다.

홍성군청은 화재와 지진 피해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66년 11월 24일 새벽 5시 40분 홍성군청 재무과 천정에서 불길이 번져 화재가 발생, 2시간 만에 목조 건물 전체가 잿더미로변했다. 옛 홍성읍지에 “화재를 당해 성 북쪽으로 옮겼다가 50년 만에 오관리 98번지로 돌아왔다”는 기록 후 두 번째 화재가 난 것이다. 건물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324만 원, 시설 피해 50만 원 이었으며 청사 내 대부분 서류가 불타버려 행정 마비를 초래했다. 치안국 화재감식반에 의해 화재원인은전기 누전으로 밝혀졌으나 그날 숙직자 이모씨, 정모씨는 직무유기로 경찰에 입건되고 강상교 군수는 충남도농촌진흥청 서무과장으로 좌천됐다.
1978년 10월 7일 오후 6시19분 52초 홍성군청 지하 10km에서 지진이 발생 반경 500m 내에 부상 2명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홍주성곽 90m가 무너지고 시내 118동의 건물이 파손되고 1100여 동 이상의 건물에 균열이 발생하였으며, 홍성군청 등 12개 공공기관의 유리창 500여 장이 파손됐다. 진도 5 지진으로 우리나라 정밀검사를 시작한 후 처음 가장 큰 규모였다.

화재 후 주민투료로 이전 안해

한편 불 탄 홍성군청은 군수실, 내무과, 산업과, 재무과 뿐인 단층 건물이었다. 후임으로 온 조대희 군수는 군청을 다른 곳으로 옮겨 지으려고 했다. 일제가 홍주의 맥을 끊기 위해 동헌을 가로막아 지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청 이전을 강력히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그러자 군청을 옮길 것인가 그 자리에 다시 지을 것인가를 묻는 군민 투표를 실시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군민들은 관심이 없고 이해가 걸린 주변 사람들만 투표에 참가해 현 위치에 다시 지었다.
군청은 1968년 불탄 그 자리에 시멘트 슬라브 3층 건물로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 증축을 거듭해 현재 본청 6개동(의회동 포함) 1816평에서 군정을 집행하고 있다. 홍성읍사무소가 이전되면서 4개동 315평을 추가해 군청 3개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52년 만에 다시 군청을 이전하게 됐다.
1925년 판 홍성군지에 보면 1923년 군청은 서무과 11명, 권업과 12명, 재무과 11명 모두 34명과 11개 면에 92명 합계 126명이 근무했다. 그 뒤 100년이 지난 현재 홍성군청 공무원은 3국 19개 과 6개 사업소(2020년 1월)에 과장 46명을 포함해 865명이다. 1923년 6월 홍성군 인구는 1만 4005호, 7만 5447명(일본인 230호, 748명 포함)이었다. 100년이 지난 현재 홍성군 인구는 10만 589명(2019년 11월 말)이다. 100년 동안에 인구는 2만 5000명 (33.1%)증가했으나 공무원은 6.8배 늘고 건물은 46배 커졌다. 100년 전 공무원 1인당 담당 주민은 599명, 현재는 116명이다.

주민은 무관심, 투표율 13%뿐

한편 홍성군청 이전에 대해 군민 대부분은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홍성군은 지난 12월 4일부터 19세 이상 유권자 8만3734명을 대상으로 청사이전 선호도 투표를 실시했다. 11일 동안 각 읍면에 찾아가 실시했으며 투표장에 가기 힘든 사람을 위해 선관위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1만 1038명만 참가해 13.27% 투표율에 그쳤다. 특히 5개 후보지가 모두 위치한 홍성읍에서는 각 후보지 관계자들이 적극적인 홍보와 동원투표를 실시했음에도 13.38%에 그쳤다. 갈산면이 27.28%, 결성면 26.51%, 장곡면 25.75% 순서로 관심이 높았으나 광천읍 7.15%, 홍북읍 8.46%에 그치는 등 읍지역 주민들이 군청이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군청 이전 투표에 불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청이 어디로 가건 내 생활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관청 이전이 그 지역 발전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웃 예산이나 청양군청이 이전됐지만 그 주변 발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군청 건물이 그렇게 크고 화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여러해 지났지만 전국 바른지역언론연대 소속 간부 기자단 10여명이 미국과 독일 등으로 기초지방자치 견학,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인구 5만 명이 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워싱턴 카운티 청사는 홍성의 한 면사무소 정도 밖에 안되며 연간 3만명이 이용하는 도사관이 더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구 4만8천명이 거주하는 독일 뒤셀도르프 옆 에어크라트시 역시 102명이 근무하는 청사가 홍성의 면사무소 정도며 40명의 시의원으로 구성된 의회는 건물이 따로 없고 마을 공회당을 빌려 오후 5시에 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궐같은 군청사에 찾아가 각종 허가를 받고 증명을 받아야 생활이 가능한 우리의 붐비는 행정기관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온라인 활성화, 행정기관의 원 포인트 민원 등 간소하게 변화되는 시대흐름 속에서 관청 위치에 따른 지나친 주변 발전 기대는 불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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