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에 200명 신앙공동체 교우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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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에 200명 신앙공동체 교우촌 있었다”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11.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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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 조현옥의 ‘새로 쓰는 홍주천주교회사’
조현옥 작가
조현옥 작가

홍주성 성지 순례객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박해시대 광천에 천주교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이 존재했다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홍성의 천주교 순교 복자 황일광 시몬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가운데 광천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추정에도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홍성신문 출판부에서 지난달 펴낸 ‘새로 쓰는 홍주천주교회사’에서 작가인 조현옥 청운대 외래교수가 이같은 주장을 폈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주교가 파리외방전도회 신부로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21년간 사목하는 동안 1857년과 1858년 광천에 머물며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비망록, 교리서를 집필했다. 배론 신학교 원장 프티니콜라 신부도 같은 시기에 광천에서 1년간 휴양하며 조선인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번역했다. 두 사람은 광천의 인접한 마을에 있으며 서로 교류했다. 지금까지 다블뤼주교가 천주교회사를 집필한 곳은 예산군 삽교읍 신리라고 여겨지면서 신리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각광을 받으며 활성화됐다. 그러나 그가 신리에 거주한 기간은 불과 5개월 밖에 안 된다. 대전교구가 2007년에 발행한 ‘여사울·성거산·신리·갈매못성지 자료집’ 에서 1857년 전후로 1년 동안 광천에 거처하며 집필했던 사실을 조 작가는 찾아냈다.

작가는 또 황일광 시몬의 무덤이 광천에 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홍주향토문화연구회가 2004년에 발간한 ‘홍주천주교사’의 병인년 박해때 순교사적지도에 ‘광천 새남골 공동묘지 황일광의 무덤’으로 표시된 기록에 주목했다.

‘새남골’은 현재 광천리 신랑동이다. 지금 삼육학교에서 광천중학교까지로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광천리에는 도축장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 대대로 도축을 담당하는 백정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황일광은 백정이었다.

그가 참수당한 후 고향 공동묘지에 묻혔을 것이란 예측은자연스러운 추론이다. 같은 시기에 광천에서는 박중환 등 4명의 신자가 잡혀와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조 작가는 천주교회 신자와 연구자들이 모르고 있던 황일광의 무덤 소재가 확인되면 홍성 역사에 소중한 소식이라고 썼다. 아울러 광천에는 다블뤼주교가 오기 전부터 교우촌이 있었던 것인가 의문을 던졌다.

광천 교우촌에 대해 분명하게 기술한 자료는 조선대목구 교구장 뮈텔이 쓴 1906년 11월 14일자 일기에서 조 작가는 찾았다.

“홍주성 북문 밖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30리를 가서 4시경 상지에 도착했다. 우리를 마중 나온 공베르 신부와는 마을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서 합류했다. 그곳은 안면도로 가는 배를 타는 석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교우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27명으로부터 고해성사를 받고 견진찰고를 했다”

 


조 작가는 여기서 몇 가지를 분석했다. ‘교우들로 이루어진 마을’은 교우촌이다. 상지는 현재 광천읍 상정리 옛 이름이다. 안면도로 가는 배를 타는 석포는 옹암리 안쪽 마을이다. 상정리 교우촌은 은하면 장척리, 결성면 수룡동, 구항면 공리로 연결된다. 신자들이 박해를 받을 경우 배를 타고 안면도, 무창포, 당진, 한양으로 도망가거나 들어올 수 있는 천연요새다. 1908년 처음 생긴 구항 공리 성당을 비롯해 은하면 덕실리 사람으로 참수된 장대원(마티아), 은하면 금국리 공소, 광천리 공소-성당들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 작가는 뮈텔신부가 상지에서 27명에게 견진의식을 가진 기록에도 주목했다. 견진은 세례 받은 신자에게 성령의 은총을 받도록 주교가 이마에 성유를 발라주며 축복하는 의식이다. 2~3년에 한 번씩 새 신자 견진행사에서 ‘27명’은 그 전부터 이미 영세와 견진받은 사람들, 그 가족까지 계산하면 200명 이상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교우촌(校友村)은 1791년 신해박해로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하자 신자들이 박해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위해 산간벽지로 이주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801년, 1839년 박해가 거듭될수록 교우촌은 전국 산간 골짜기로 퍼져나가며 조성됐다. 험준한 산골에서 담배 농사를 짓거나 옹기 만드는 일 등을 하면서 가난하지만 재물을 나누며 신분의 차별 없이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공동생활을 했다.

박해시대 천주교회는 교우촌을 중심으로 유지, 운영되며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신앙이 전파됐다. 충청도에는 서천, 한산, 홍산, 비인 등 남쪽에 많았으나 홍성이나 광천에 있었다는 기록은 그동안 없었다.

2004년부터 15년째 천주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조현옥(51세) 작가는 5년에 걸쳐 충청도의 모든 공소를 걸어다니며 답사한 내용도 사진과 함께 이 책에 담았다. 특히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리 추도에서 태어나 광천여중을 졸업하며 살아온 작가는 광천 교우촌 역사에 누구보다 실제적인 연구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에 ‘새로 쓰는’ 부제를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교자만 아니라 배교자, 옛 사람 만 아니라 지금 살고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썼습니다. 내포에 갇혀있지 않고 행정중심 홍주 관할 이야기로 썼습니다. 옛 지명에는 현재 지명 토를 달았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왜 배 타는 사람, 염전 노동자들 중에 많은지 연구자들도 잘 몰라요. 광천 교우촌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은 그가 태어난 추도, 이제 한 명 남은 교우촌 이야기로 마감한다. 오천항에서 한 시간 배를 타고 가야되는 추도 사람들이 갈매못 성지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고 미사 드리는 신앙생활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신앙생활과 다를바 없었다는 것이다.

“뱃 사람, 노동자, 백정 등 서민들이 천주교에 입문하고 공소를 만들고 박해 받아 죽는 사람을 보고 전파하며 200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간 구세사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사이드에서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광천의 황일광 무덤, 다블뤼주교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순교사 집필 유적지, 상정리 교우촌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더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 조현옥 작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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