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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8> 김현승 - 가을, 고독 그리고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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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8> 김현승 - 가을, 고독 그리고 커피
  • 홍성신문
  • 승인 2019.10.1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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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미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가을은 <타오름>의 계절이다. 계절을 건너와 쌓인 모든 양분들은 가을이 되어 마침내 생명으로 타오른다. 향기로 흩어지는 봄꽃과 달리 가을의 열매는 자기 안에 향기를 가둬 마침내 생명을 틔워내는 것이다. 가을의 열매들이 생명을 담아내는 건, 자연의 풍상을 홀로 견뎌낸 꿋꿋함 때문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낸 인내가 마침내 열매마다 생명을 담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가을이 유독 외롭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저 홀로 역경을 뚫고 나오는 수고가 없이는 단 한 톨의 열매도 생명을 틔워낼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시인 김현승의 삶 또한 그러했다. 그에게 삶은 열쇠를 잃어버린 외딴 방과도 같았다. 수천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들고 문을 열어보지만 그 어떤 열쇠로도 열 수 없는 외딴 방,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쓸쓸하고 고독했으며 애절했고 또한 간절했다.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에겐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굴레가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목회자인 아버지 밑에서 신(神)을 만났지만, 신은 외딴 방과도 같은 그의 삶에 그 어떤 열쇠도 되어주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 제주로, 광주로 떠돌며 그는 자연을 통해비로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 자연은 자신의 속내를 비춰 줄 최고의 벗이 돼주었다. 그것은 곧 <문학>이라는 이름의 비유가 되어 그의 삶을 이끌었다. 비유야말로외딴 방과도 같은 자신의 삶을 열어줄 열쇠임을 그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먼 길을 올 제/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함께 걸어간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사랑하는 나의 창이열린 길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연 예찬은<가을의 기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시 <가을의 기도>는 나그네와도 같은 우리네 인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플라타너스처럼 누군가와 함께 걷거나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서로를 비옥하게 해주는 일임을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커피를 좋아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절을 건너온 모든 양분들이 한 잔의 향미로 담겨지는 커피는,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함께 걷는 플라타너스만큼이나 넉넉한 자비이자 은총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면 차를 끓이는 나의 고독도 깊어간다>던 그는 자신이 마실 커피는 자신이 손수 끓여 마시는 커피의 달인이었다. 그는 <커피는 써야 제 맛>이란 고정 관념 대신 <시고 달아야 커피>라 생각한 드립 커피의 장인이었고 <맛없는 커피란 맛 좋은 냉수만도 못하다> 생각한 절대 미각의 소유자였으며, <커피를 제대로 끓이려면 산지별 커피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한 커피 블렌딩의 선구자였다. <차는 외로이 앉은 까마귀를 보며 홀로 마셔야 제 격>이라 여긴 그에게, 커피는 고독에 이르는 각성의 음료이자 외딴 방의 쓸쓸함을 달래줄 위로의 음료였다. 수천 개의 열쇠로도 열 수 없는 외딴 방에서 그가 얻는 것은, 삶이란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는 플라타너스처럼 그렇게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시간을 비옥하게 가꿔주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지극한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고독을 견뎌낸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무더운 여름을 이겨 마침내 생명을 담아내는 열매처럼, 김현승 시인 또한 고독을 이겨내고 마침내 사랑의 향기를 틔워낸 것이다. 그가 다형(茶兄)이란 필명을 얻은 건, 오랜 고독 끝에 일궈낸 넉넉한 인심, 그리고 형과도 같은 푸근한 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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