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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3·1운동은 근대적 지식인들이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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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3·1운동은 근대적 지식인들이 주도”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9.23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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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학연구소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곽신환 교수 홍성운동 특징과 의의 5가지 정리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조발표하는 곽신환 숭실대 교수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조발표하는 곽신환 숭실대 교수

 

청운대학교 남당학연구소(소장 민황기 교수)는 충남대 유학연구소와 함께 지난 18일 청운대에서 ‘홍주지역의 3·1운동과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열었다.

학술대회는 1부에서 곽신환 숭실대 교수의 ‘홍성지역 3·1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기조발표를 들었다. 2부는 최정묵 충남대교수의 사회로 이재준 건양대 교수의 ‘홍주지역 3·1운동의 연원과 배경’, 민황기 청운대 교수의 ‘홍주지역 3·1운동 독립운동가의 유교학맥 연구’, 박용태 위덕대 교수의 ‘홍주지역 민족주의 제 세력과 3·1만세운동’,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의 ‘홍성3·1운동공간의 기억과 활용’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했다.

대회는 김석환 군수, 홍문표 국회의원, 광복회 회원 등 주민 150여 명이 참여했다. 곽신환 숭실대 교수는 기조 발표에서 홍성지역 3·1운동의 특징과 사상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감동적인 3·1절 노랫말에 실제와 다른 3가지 오류가 있다. 3·1만세운동은 기미년 ‘정오’에 터진 물결이 아니다. 독립만세는 평양에서 오후 1시에 먼저 불렀고 서울에서는 오후 2시에 불렀다.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삼천만’이 아니라 당시 인구는 ‘이천만’이었다. 3월 첫 두 주간 전국에서 276회의 시위가 일어났는데 197회(71.3%)가 북한쪽에서 일어났다.

당시 독립선언문은 8500매가 배포됐다. 천도교에서 북부 2000매, 전남·충북 2000매, 기독교에서 서울, 경상도, 평양, 개성, 원산 등에 1500매, 불교계에서 서울에 3000매를 배포했다. 그런데 충청남도와 전남, 부산이 빠져있다.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홍성지역 3·1운동의 특징과 사상사적 의의를 다음 5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홍성은 한말 이래 의병과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왕성해 항일정신이 두드러진 곳이다. 게다가 근대적 교육활동이 많아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이 형성됐던 곳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집단이 공존했다.

△ 홍성, 광천, 장곡 등 몇 곳은 서울에서 3·1운동 가치인식을 지인 지역 인사들이 내려와 전하고 그들이 주도하여 운동이 일어났다.

△ 산 위에서 횃불과 깃발을 들고 만세, 시장이나 연극 공연장 등에서 만세를 부르는 등 형태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양하다. 4월 4일 금마, 홍북, 홍동, 구항 4개면 24개 마을에서 동시에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채롭다.

△3·1운동에 대해 민족운동, 민중운동, 정의와 인도적 운동, 민족정신 환기운동, 조국해방운동, 민족적 사회운동, 인민혁명운동 등 학자에 따라 규정이 다른데 홍성지역의 성격 규정은 민중 또는 인민혁명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는 부족하다. 유교가 망국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불신당했던 가운데서도 홍성의 대중적 지도력은 유림이었다.

△홍성은 동학교도가 많고 천도교가 강했지만 천도교 활 약상은 두드러지지 않고 의병 후예들이 운동에 참여해 특성화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틈새에서 근대적 지식인들이 주도한 홍성의 3·1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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