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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4> 이난영 -고향에서 부르는 ‘다방의 푸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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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4> 이난영 -고향에서 부르는 ‘다방의 푸른 꿈’
  • 홍성신문
  • 승인 2019.09.0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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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충남본부장
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충남본부장

다방은 <푸른 꿈>을 꾸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분홍 꿈>을 위한 공간이다. 담배 연기와 음악,정담(情談)이 뒤섞여 흐르던 추억속 다방은 일상의 번다함을 씻어줄 휴식의 공간이었다. 거기엔 여유가 있고 낭만이 있으며 만남이있고 헤어짐이 있었다. 전쟁과도같은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 전쟁과도 같은 일상의 포화(砲火)를 씻어내는 곳, 그곳이 바로 다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다방에서 꾸는 꿈이란 푸르기보단 차라리 분홍에 가깝다. 젊음을 불태워 얻는 청운(靑雲)의 꿈이란, 다방과는 거리가 먼 학교나 직장, 혹은 사회에서 꾸어야 할 꿈인 것이다.

그럼에도 다방에서 푸른 꿈을 꾸는 사회는 서글프다. 학교나 직장, 사회에 나가 일해야 할 청춘들이 다방에 앉아 푸른 꿈을 꾸는 시대는, 생각만으로도 암울한 절망의 시대인 것이다.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고요한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부르누나, 부르누나/흘러간 꿈 찾을 길 없어...>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은 꿈을 잃은 청춘을 향한 절절한 헌시(獻詩)였다. 현실이 이성의 공간이라면 다방은 감성의 공간이고, 현실이 실존의 공간이라면 다방은 여흥의 공간이다. 이성을 놔버린 채 감성만으로 살 수 없듯 실존을 놔버린 채 여흥만으론 살 수 없다. 이성이 결여된 감성도, 실존이 결여된 여흥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감성과 여흥만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란, 꿈이나 희망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제 식민 시대의 절망이 낳은 역사적 비극이었다.

이난영이 <다방의 푸른 꿈>을 부른 건 일제 수탈정책이 한창이던 1930년대였다. 그녀의 고향 목포는 호남벌판에서 모은 쌀과 목화, 소금을 일본으로 앗아가던 수탈의 길목이었다. 가뜩이나 힘든 식민 생활은 광풍처럼 몰려온 대공황과 맞물려 핍절의 삶을 부채질했고 시시각각 들려오는 전쟁 소식은 암울하다 못해 공포스러웠다. 가난을 비관한 대학생이 투신자살하고 일제에 항거하던 청년이 만주 벌판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이 땅의 청춘들을 다방으로 내몰며 생떼 같은 젊음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도, 온전히 버릴 수도 없는 이 땅의 청춘들은 다방 한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끓어오르는 울분을 달래야 했다. 한 잔에 10전쯤 하던 비싼 커피값은 그들에겐 차라리 위안이었다. 사무직 여급의 일당이 60전 하던 시절, 두 시간 일해 겨우 한 잔 마실 수 있는 다방의 커피값은 길 잃은 청춘에겐 차라리 보상과도 같았다. 그 시절, 가난한 청춘들의 외상값을 눈감아준 건 어쩌면, 길 잃은 청춘들을 커피 향으로라도 달래주고픈, 훈훈한 마음이 빚어낸 미담이었을 것이다.

스러져가는 청춘을 망각하는데 이난영만큼 좋은 묘약은 없었다. 콧소리와 함께 녹아드는 그녀의 창법은 누를 길 없는 청춘의 아픔을 달래며 시대의 위로가 되어갔다. 열여덟 살 소녀의 목소리는 앳되고도 구슬펐다. 어린 시절 겪은 가난과 질고는 그녀의 목소리에 애수를 더했고 무명의 막간 가수였던 그녀는 <다방의 푸른 꿈>과 <목포의 눈물>을 잇달아 부르며 엘레지의 여왕이 되어갔다.

추석을 앞두고 그녀를 생각하는 건, 일곱 남매를 향한 그녀의 애끓는 모정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음악인 김해송과 결혼한 그녀는 6.25 전쟁과 동시에 남편을 잃었고, 남겨진 일곱 남매를 한국 최초의 보컬 그룹 <김 시스터즈>와 <김 브라더즈>로 길러내기까지, 가시밭길과도 같은 눈물의 길을 걸어야 했다. 어머니란 어느 시대고 그런 존재였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주먹밥을 얻기 위해 눈물로 노래하던 이난영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다방만큼이나 퇴색돼버린 고향이 여전히 따뜻한 건, 자식들을 눈물로 기다리는 숱한 어머니들의 변치 않는 그 모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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