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8:41 (금)
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2> 박태원 - 오후 두 시의 다방에서 구보를 만나다
상태바
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2> 박태원 - 오후 두 시의 다방에서 구보를 만나다
  • 홍성신문
  • 승인 2019.08.26 23: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미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오후 두 시의 다방은 ‘구보’들의 세상이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룸펜들의 세계다.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의 질서로 세상을 재편한, 그리하여 왕따를 양산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왕따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오후 두 시의 다방인 것이다. 그들은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다방에앉아 객쩍은 한담(閑談)을 나눈다. 운이 좋다면 카루소가 불러주는 엘레지나 스키퍼의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 피로를 느낀다. 자발적 룸펜이란 말은 수사(修辭)일 뿐,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룸펜을 택한 탓이다.

박태원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그렇게 탄생했다. 오후 두 시의 다방에서 객쩍은 한담을 나누던 소설가 구보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모습이자 박태원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욕망이 거세된 식민치하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꿈을 꿀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는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애시당초 꿈이 없거나 소리 따윈 갖지 않았던 듯 능청을 떠는 게 전부였다. 꿈을 놓쳐버린 자리는 객쩍은 한담이 대신했다. 생각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건 찰나를 채워줄 감각이다.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엔 삶을 향한 그 어떤 천착도 드러나지 않는다. 거리를 떠돌며 구보가 느끼는 건 그때그때 와닿는 찰나의 감각이 전부일 뿐이다. 집을 나서서 돌아오기까지 그는 백화점의 효시라 할 화신상점에 들러 쇼핑 온 부부를 훔쳐도 보고 목적 없이 탄 전차 안에선 맞은 편 여성을 곁눈질해보며 우연히 지나게 된 조선은행 앞에선 구두를 닦으라 권하는 구두닦이에게 까닭 모를 혐오를 느낀다. 구보 씨에게 삶은 완성해야 할 미래가 아니다. 구보 씨에게 삶이란 현실의 갈증을 달래줄 누군가와의 조우이거나추억일 뿐이다. 군중 속에 있어도 늘 외로운구보 씨의 고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 모를 갈증을 유발하며 경성의 뒤안길을 돌고 또 돌도록 부추긴다.
부초(浮草)와도 같은 구보의 삶은 다방에 이르러 비로소 쉼을 얻는다. 거기엔 피로를 함께 나눌 동지가 있고 추억을 함께 할 교우가 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문턱너머 저 쪽과는 다른 안온한 느낌으로 그를 감싸 안는다. 그러기에 그는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강아지를 소리 내 부르고 늦도록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줄 것을 종용한다. 다방 안 분위기가 주는 동지의식이 관찰자였던 그를 마침내 움직이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소설 속 구보 씨가 소설가 박태원과 겹쳐지는 건 바로 이 부분에서다. 소설 속 구보를 자신의 호로 쓸 만큼 애착을 가졌던 박태원은 실제 <낙랑파라>라는 다방을 드나들며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넓혀갔다. 이광수처럼 식민 권력에 영합하지도, 이육사처럼 식민 권력에 저항하지도 않은 그에겐, 문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울 자신만의 세계가 필요했다. 부초와도 같은 그의 삶은 오감도의 시인, 이상이 있어 행복했다. 다방 <제비>를 열어 문인들의 결속을 다진 이 상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삽화를 맡으며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갔다. 박태원도, 이 상도 식민치하의 우울을 견뎌낼 자신만의 작품을 구축하며 시대의 내상을 견뎌낸 것이다.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엔 작가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열등생이었던 중학 친구와의 갑작스런 조우다. 중학 친구를 따라 나온 예쁘장한 신여성은, 가루삐스(칼피스)를 주문한 중학 친구와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맛있게 먹는다. 구보는 두고두고 여자의 당돌함을 떠올린다. 자신의 취향 앞에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당돌함이야말로 식민치하의 삶을 지탱해줄 가장 큰 무기임을 그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