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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1>푸치니-에스프레소로 즐기는 기다림의 미학(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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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1>푸치니-에스프레소로 즐기는 기다림의 미학(美學)
  • 홍성신문
  • 승인 2019.08.19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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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끝에 얻게 되는 삶이 있다. 여름을 견디고 맞는 가을처럼, 세월의 두께를 견디고 맞는 인고의 시간들이다. 가을은 땀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숨 막히는 한여름 무더위를 견디고 나면, 가을은 선물처럼 그렇게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다.

푸치니에겐 오페라가 그랬다.

그의 고향 루카는 오페라의 발상지, 피렌체와 인접한 도시였다. 오페라의 대가 베르디가 <아이다>를 공연한 곳 또한 인근 도시, 피사였다. 오페라를 보고 자란 그에게, 오페라를 꿈꾸고 오페라를 만드는 건 숨 쉬는 일 만큼이나 당연한 결과였다. 4대째 성가대를 섬기며 음악을 대물림한 그였지만, 그에게도 넘겨야 할 고비는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그에게 음악은 한여름 무더위만큼이나 버거운, 버리고 싶은 운명이었다. 그는 음악을 하는 대신 악기를 팔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뎠다. 교회 파이프 오르간에 붙은 파이프를 팔아 담배를 산 건, 이유 없는 반항의 결정타였다. 음악이 운명임을 확신하기까지, 그는 버티며 저항했고 두드려 확인했다. 그런 그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준 건 홀로 된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묵묵히 곁을 지켜준 어머니는 밀라노 음악원에 그를 보내는 것으로 무더위와도 같은 인고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음악원 학비를 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건, 푸치니를 음악에 전념케 한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푸치니에게 기다림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친구 부인 엘비라와 결혼한 그는 엘비라의 끝없는 의심에 언제고 몸을 사려야 했다. 오페라 속 여주인공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 그는, 정작 염문과는 상관없는 하녀 도리아와의 관계를 의심받았고 엘비라의 학대를 못 이긴 하녀는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을 감행한다. 하녀 도리아의 자살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아픔으로 남았다. 부검 결과 처녀로 밝혀진 도리아의 자살은, 삶이란 때로 기다림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작품 곳곳에 물감처럼 스며들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 초초아의 지순한 기다림은 어쩌면, 아내 엘비라도, 하녀 도리아도 보여주지 못한, 지고지순한 사랑에의 염원이자 푸치니 자신의 로망일 수도 있었다.

푸치니에게 커피는, 기다림 끝에 얻게 된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1901년, 밀라노엔 커피 추출의 혁명이라 할 에스프레소 머신이 첫 선을 보였고, 에스프레소가 주는 진하고도 고소한 향미는 푸치니의 역작 <나비부인>과 <투란도트>를 채우는 또 하나의 활력이 되어주었다. 루이지 베제라가 개발한 에스프레소 머신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중력을 활용하는 핸드드립과 달리, 압력을 활용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압력이 주는 새로운 향미와 더불어 커피 역사에 새 장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핸드드립이 라르고(Largo. 느리게)라면, 에스프레소는 비바체(Vivace. 빠르게)였고 핸드드립이 그라지오소(Grazioso.우아하게)라면 에스프레소는 파쇼나토(Passionato.열정적으로)였다. 베르디와 함께 즐겨 찾던 카페 코바에서 그는 에스프레소가 주는 짙고도 화려한 향미에 자신을 내맡기곤 했다. 음악과 커피가 어우러진 카페 코바는 이제 세계 최대 명품 그룹 루이비통의 소유가 되어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밀라노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다. <파리는 화려하고 런던은 아름답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토스카나의 어촌, 토레 델 라고다.> 그가 오랜 기다림 끝에 선택한 것은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아닌, 질그릇과도 같은 소박한 일상이었다. 그가 돌아가려 한 토레 델 라고는, 어머니를 잃고 친구 부인 엘비라와 함께 도망치듯 숨어든 토스카나의 어촌이었다. 세상의 잣대가 어떠하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곳, 찢기고 얼룩진 자신의 영혼을 말갛게 씻어줄 마음 속 고향이 바로, 그가 오랜 기다림끝에 얻고자 한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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