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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0> 안중근-끽다점(喫茶店)에 앉아 이토를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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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60> 안중근-끽다점(喫茶店)에 앉아 이토를 기다리다
  • 홍성신문
  • 승인 2019.08.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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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미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공기는 매서웠다. 가을의 중턱을 넘었을 뿐인데,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 어쩌면 삼엄한 경비 탓일 수도 있었다. 하얼빈을 점령한러시아는 역사(驛舍) 곳곳에 헌병들을 둘러 세웠고, 역사를 오가는 행인들은 행여 몸수색이라도당할까, 서둘러 걸었다. 잠시 후면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할 것이었다. 조선에 이어 만주 찬탈을 꿈꾸던 그는 러시아와의 협약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기세등등했다.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황후 시해와 황제 폐위를 통해 조선의 패권을 거머쥔 일본은, 대동아공영이라는 또 다른 기치를 내세우며 만주 찬탈을 도모하고 있었다. 침략자 이토의 방문에, 하얼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하얼빈역 끽다점(喫茶店)에 앉아 안중근은 이토를 생각했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이름이었다. 조선의 국모가 시해됐을 때도, 조선의 국왕이 폐위됐을 때도, 그 모든 역모의 정점엔 늘 이토가 있었다. 황해 땅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듣고 자란 장부의 삶이란, 약자를 변호하고 강자를 견제하는, 부당한 일도, 불편한 일도 없는 하나된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세상의범부(凡夫)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나라의 재상이 어찌, 이웃 나라를 빼앗고 백성을 능멸한단 말인가. 끽다점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는 가슴에 품고 온 권총을 더듬었다.제형은 작아도 화력이 좋다는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는 등불을 밝히고 앉아 실탄을 갈았다.따지고 보면 그의 삶은 늘, 실탄을 가는 일의연속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실탄을 갈 듯 그렇게자신을 갈아 세상에 드리는 일이 전부였다.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진남포에 학교를 세운 것도, 국채보상운동에 가담해 일본에 채무를 갚으려 한 것도,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의병을 일으킨 것도 모두가 그 스스로 역사의 실탄이 되고자 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를 저격한 후의 삶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이토를 과연 저격이나 할 수 있을지, 그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거사는 행해져야 한다. 식어진 커피를 되돌릴 수 없듯, 인간의 삶 또한 되돌릴 수 없다. 약지를 잘라 동맹을 맺듯, 지금은 오직 나아갈 때, 전진할 때다. 식어진 커피를 앞에 두고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멀리서 경적이 울렸다. 이토를 태운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였다. 그는 서서히 일어나 군중을 향해 나아갔다. 커피 향이 달콤한 포연처럼 목덜미를 휘감으며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사이, 기차가 멎고 이토라 짐작되는 사내가 내렸다. 마중 나온 러시아 대사와 일본 영사관, 수행 비서들에 가려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이토라 짐작되는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세 발의 총성이 울리고 한 사내가 쓰러졌다. 그러고도 그는 권총을 들어 세 발의 총탄을 더 쏘았다. 쓰러진 사내가 이토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불안감에서였다. 정지된 듯, 숨 가쁜 시간이 흐르고 러시아 헌병들이 그를 덮쳤다. 군홧발에 찢기고 짓눌리며 그가 외친 건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였다. 그것은 실탄을 갈 듯 자신을 간 자만이 외칠 수 있는 마지막 절규였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는 그는 <배우기에 힘쓰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 말라>던 또 다른 그였고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던 또 다른 그이기도 했다. 서른두 살의 청춘을 드려 역사를 세우려 했던 그는 다음 해 3월 뤼순 감옥에서 생을 다했다. 백여 년이 지난 오늘과는 너무도 다른,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하나 된, 동양의 평화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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