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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58>무라카미 하루키 - 커피 한 잔으로 즐기는 일상의 ‘소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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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58>무라카미 하루키 - 커피 한 잔으로 즐기는 일상의 ‘소확행’
  • 홍성신문
  • 승인 2019.08.0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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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미 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 미 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삶의 여유는 틈새에서 온다. 그것은 삶의 숨구멍과도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한없는 가벼움으로 채워주는, 벽과 벽 사이, 혹은 현실과 현실 사이 작은 숨구멍, 그것이 바로 틈새인 것이다. 그것은 캄캄한 동굴 속을 파고드는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현실의 절망은, 동굴 속을 비춰주는 한 줄기 빛으로 인해 위무(慰撫)되고 또한 격려되는 것이다.

소설가 하루키가 빛나는 건 이 지점에서다. 그에게 삶은, 농담과도 같은 한없는 가벼움이다. 그가 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결코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죽기 살기로 현실에 대응하는 대다수 주인공과 달리, 그가 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삶에서 물러나 관조하거나 응시할 뿐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라는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의 독백은, 암울한 시대를 건너온 하루키 자신의 다짐이자 독백이기도 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시대나 역사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개인이 치러야 할 삶의 무게들,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고 남는 작고도 소소한 일상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이별은 전쟁보다 무서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해방보다 벅찬 일이다. 사랑이나 이별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이란 해방보다 중하고 전쟁보다 더 치열할 수 있음을, 하루키의 소설들은 드러내고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청년 시절을 보낸 건 1960년대였다. 대학가 이념 논쟁이 불붙던 시대, 그는 이념의 자리에 사랑을 앉히며 시대를 논했다. 한 남자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 남자의 친구였던 한 남자와, 그 남자의 애인이었던 한 여자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자살을 결심할 만큼의 갈등>이 소설화되던 시대, <자살을 곁에서 지켜본, 한 발짝 물러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가벼움을 추구한 그는 관조와 응시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노래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틈새였다. 상실이라는 무거운 감정을 발랄하게 그려낸,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는 소설 <상실의 시대>는, 소설 속에 수록된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과 함께 젊은 시절의 영원한 향수로 남았다.

그는 끔찍이도 커피를 아꼈다. 1994년,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를 통해 <소확행(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을 처음 언급한 그는, 평생을 벗 삼아 뛴 마라톤만큼이나 커피를 아끼고 사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부터 찾은 그는 큼지막한 머그잔에 커피를 채워 글 쓰는 틈틈이 나눠마시곤 했다. 그에게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처럼 따뜻한>, 음악 같은 음료였다. 평안한 음악이 듣는 이의 마음을 평안으로 이끌 듯, 그윽한 향미의 커피 또한 마시는 이의 마음을 풍요로 이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풍경조차도 자신을 축복한다>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을 읽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다.> 남과는 다른 삶을 살려 한 그는 <무언가를 추구하기보다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여긴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는 시작되고, 자유롭기 위해선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문제들을 내려놔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로 자신만의 문체를 삼은 그는 소설에서조차 <더 많이 버려 더 많이 얻으려 한> 사람이었다. 한 자 한 자 육필원고를 쓰며 그가 마셨을 커피는 지금, 우리들 곁에 있는 또 한 잔의 커피이기도 하다.커피 한 잔에서 얻는 소확행의 기쁨은, 더 많이 버려 더 많은 것을 얻을 때 비로소 풍성해짐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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