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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이 곧 건국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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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이 곧 건국운동이다”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7.11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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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한국전쟁기 희생된 민간인들<4> 이강세 전 홍성군농민조합장
▲ 이강세가 훼손했다는 홍주성 내 신사(홍성문화원 자료)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홍성의 젊은 지식인 지도자 그룹은 즉시 홍성군자치위원회를 결성해 군청과 경찰서를 접수, 어수선한 질서를 바로잡고 행정과 치안을 맡았다. 충남도내에서 가장 빠른 주민조직이었다. 이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사회민주동맹 등으로 이어졌다. 만해 한용운 아들 한보국, 유승준, 김영환 전 국회의원 등 24명의 지도자 중 유일한 농민대표가 있었다. 이강세였다.

이강세는 1909년 홍동면 금당리 황새울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홍성읍 월산리 장씨 집안으로 개가한 모친을 따라가 1927년 홍성공립보통학교를 17회로 졸업했다.

이강세는 스무살이 되던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강세의 이복동생인 장모 전 홍성축협 조합장 증언에 의하면 남산공원 신사를 훼손하고 지명수배 돼 일본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날 일본 천황에게 참배하는 신사에 오줌을 누고 침을 뱉으며 훼손시키다 일본인 읍장에게 들켰다. 배를 타고 밀항, 일본에 도착해 어느 허름한 집에 들어갔는데 목공소였다. 거기서 일해주며 지내는 동안 목공과 농사기술을 익혔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잡혀 감옥생활을 하며 고문도 당했다.

이강세는 3년 쯤 후 귀국했다. 현재 홍성군농업기술센터 인근에 넓은 토지를 마련하고 일본에서 배운대로 앞서가는 농사를 지었다. 이웃사람들에게 새 농사법과 신품종을 보급하고 종자를 개량하는 등 모범적인 농촌 청년 지도자였다. 월산리 최호인에게 종묘상회 ‘풍농원’을 하자고 제안해 화초와 관상목, 과수 묘목을 판매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그는 해방 직후 홍성군농민조합장이 됐다. 1945년 12월 8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이강세는 김우진 이민혁과 함께 홍성군 대의원으로 참여했다. 농민조합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의 주축세력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을 중지, 잠적했다가 1945년 해방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남북한 13개 도 188개 군에 농민조합 지부가 조직됐으며 전국의 조합원은 330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조합의 요구는 민족반역자 및 대지주 토지 몰수와 토지분배, 양심적조선인 대지주에 대한 소작료 3·7제, 미군정
의 양곡수집령 반대 등 28개 항목이었다.

미군정의 양곡수집령이 일제하 공출제도와 같다며 반대투쟁을 벌인 농민조합은 1946년 10월 대구에서 폭발했다. 추수폭동, 10월항쟁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 형 박상희가 좌익운동을 하며 2000여 명 군중의 선두에서 구미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싸우다 경찰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 앞줄 가운데 이강세, 왼쪽 김영환 전 국회의원, 이강세 뒤에서 머리를 젖히고 있는 사람이 한보국. (이강세 아들 이종민이 소장한 사진으로 1920년대 초로 추정)


농사기술과 정치투쟁 병행

“농민운동은 곧 건국운동이다”고 주장하는 농민조합은 정치적 투쟁을 병행했다. 홍성군농민조합은 이강세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농사기술을 보급하며 일제잔재를 청산하는데도 첨병역할을 했다. 이때 이정기 홍성군수(일본총독부 고등계 형사)와 악질, 친일파 공직자 몇 명이 응징을 당했다고 한다.

홍성농민조합원들은 1946년 10월 대구· 경북지방의 항쟁에 대한 호응투쟁을 벌였다. 10월 18일 새벽 2시경 갈산과 구항면 지서를 습격, 경관들을 구타했다. 곤봉과 죽창을 든 300여명이 6시경 홍성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의 응전으로 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인근 야산으로 흩어졌다.(미군정 G-2보고서).

지하에 숨어있던 100여명의 조합원들이 검거됐으나 수장인 이강세는 오리무중이었다.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어머니 홍씨, 부인 이묘희씨 등을 집 주변에서 잠복근무하며 감시했다. 이강세는 원산도 근방에서 고기잡는 어부로 변장, 광천 옹암포 인근으로 접근하며 자수할 때까지 2년 반 동안 4번 형사들의 눈을 피해 집에 다녀갔다. 사람들은 그를 변장의 귀재, 홍성의 홍길동이라고 불렀다. 이강세 부인의 배가 불러왔다. 경찰은 남편이 오면 신고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배에 총부리를 겨누며 협박했다. 이묘희는 혼절하면서도 뱃속의 아이를 지켜달라고 빌었다. 이때 외아들 이종민이 태어났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친일청산의 반민특위를 구성하자 기대를 건 이강세는 다음해 홍성경찰서에 자수한다. 1950년 1월 25일 홍성보도연맹이 결성되면서 이강세도 가입했다. 보도연맹은 좌익사상에 관여했던사람들을 전향시켜 지도한다는 취지로 만든민간단체다. “우리는 북한 괴뢰정권을 절대 반대한다”는 등 5개 강령으로 좌익계열과 투쟁할 것을 내외에 선포한 반공단체였다. 홍성보도연맹은 박헌교 경찰서장이 이사장, 이강세가 선전부장이었다. 과거 좌익 활동했던 사람 뿐 만 아니라 취직알선 등 혜택을 기대하고 가입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실권을 갖고 연맹원 가입자격을 심사하는 이강세 집에는 한동안 하루저녁 10여 명씩 보도연맹 가입 희망자들이 모여 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강세 사촌동생으로 홍동면 인민위원장을 했던 이관세는 이강세 부인한테 찾아와 “형님이 나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주지 않는다”며 불평했다는 것이다. 이강세는 선전부장이라는 직책으로 보아 반공정책을 홍보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받을 혜택 등을 선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군과 경찰은 그를 놔 두지 않았다. 6월 25일 삼팔선에 전쟁이 터지고 7월 12일 인민군이 홍성에 진입하기 전날 이강세를 포함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학살하고 후퇴했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동조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예방학살로 추정하고 있다. 이웃간 살육전쟁 비극의 단초였다.

▲ 이강세

보도연맹 양조장 행방 묘연

한편 이강세는 보도연맹원으로 가입하면서 홍성경찰서장에게 가난한 보도연맹원들의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양조장을 허가 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전답을 팔아 양조장 ‘도수원’을 설립 운영했다.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알려진 막걸리 양조장 ‘도수원’은 보도연맹원들이 흑자로 운영했다. 그러나 6·25가 터져 보도연맹원들이 하루아침에 학살당하자 문을 닫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똑 같은 장소에 양조장 하나가 생겨났다. ‘도수원’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주인으로…. 수년 전까지 운영하던 그 양조장은 건물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채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2016년 광천 오서산 폐금광에서 발굴한 21구의 유해 중 DNA 검사에서 2명의 유족이 친자확인으로 부자관계를 찾게 됐다. 이강세는 70년 만에 아들을 만나, 사랑했던 아들의 품에서 영면하게 됐다.

이강세가 보도연맹으로 구금돼 있던 홍성경찰서 상무관 벽에 연필로 써내려간 시조 한수가 남아있어 당시 심경을 보여주고 있다.

설한풍 눈보라에 하도만 시달려서 / 잎 다진 무궁화 줄기마저 꺾이었다 /봄바람 단비 오면 거름부터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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