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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종호 삼성전자 사장 · 스마트공장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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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종호 삼성전자 사장 · 스마트공장지원센터장
  • 윤진아 시민기자
  • 승인 2019.04.25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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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휴대폰=품질' 공식 만든 제조공법 전문가
말단사원 입사해 사장 올라…삼성전자 휴대폰 혁신 주도
 

공장장 꿈꾸던 삼성맨, 최고경영자 되다

김종호(63세·홍동면 문당리) 삼성전자 사장은 부품·소재 분야 최첨단 제조공법 전문가로 손꼽힌다.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삼성전자 최고경영자에 오른 그의 삶은 ‘도전’ 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꿈은 선생님이었어요. 공대에 입학한 뒤로는 유능한 기술자가 되고 싶었죠. 삼성전자에 입사해 처음 품었던 꿈은 공장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김종호 사장은 198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휴대폰 생산 관리 업무를 담당하다 2013년 글로벌기술센터장(사장)에 올라 삼성전자 전사 품질혁신활동을 주도했다. 이후 삼성중공업으로 이동해 생산부문장을 맡던 김종호 사장은 2017년 갤럭시노트7 발화 사태때 삼성전자로 복귀, 글로벌품질혁신실장(사장)을 맡아 삼성전자의 품질과 명성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 2015년 삼성 ‘플레이 더 챌린지’ 강연 중인 김종호 사장 <사진제공=삼성전자>

삼성 신경영 이끈 ‘애니콜 화형식’

김종호 사장은 삼성전자 휴대폰 혁신을 주도해온 최고 전문가로 통한다. 특히 무선사업부 제조분야에서 ‘삼성 휴대폰=품질’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종호 사장이 불붙인 ‘애니콜 화형식’은 삼성 신경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이후 갤럭시 휴대폰이 세계 1위로 우뚝 서는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5년 500억 원 규모의 전화기 15만 대를 불태운 바 있다. 휴대폰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자 품질에 대한 경각심을 새기고자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때 김종호 사장은 제조부장으로서 가전제품 더미에 불을 직접 붙였다.

“내 자식 같은 제품을 태울 때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었어요. 그때 느낀 뼈저린 아픔이 삼성전자 임직원들에게 품질의 중요성을각인한 소중한 경험이 됐고, 그러한 혁신의지가 오늘날 삼성전자를 세계 스마트폰 시장 선두주자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삼성전자가 2014년 출시한 갤럭시S6의 몸체를 플라스틱에서 금속으로 바꾼 데도 김종호 사장의 공헌이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김 사장은 6개월 안에 베트남에 대규모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스마트폰 생산에 필요한 설비를 설치하는 일을 주도해 갤럭시S6을 제때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홍동초·홍성중·홍성고 졸업

홍동면 문당리가 고향인 김종호 사장은 김기영(88세), 故이석순 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홍동초등학교(45회), 홍성중학교(22회), 홍성고등학교(30회)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동네 선·후배들과 20리 길을 함께 등하교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게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비가 내려 냇가 물이 불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업고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산골마을이었죠. 20여 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판사 2명, 국회의원을 배출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어요. 저 또한 부모님의 격려 덕분에 더 잘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홍여고 연대장 ‘첫사랑’ 아내

김종호 사장의 아내 조문희(63) 씨도 홍동 사람이다.
“학창시절 통학 버스에서 집사람을 자주 봤는데, 단아하고 총명한 모습에 호감이 갔지요. 그러다 홍성 지역 학생회 간부 모임에서 저는 홍성고 연대장, 아내는 홍여고 연대장으로 참석했고,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첫사랑이 싹텄죠.(웃음)”

친구들과 함께 떠난 속리산 여행길에서 <예비고사 끝나는 날 봅시다 -속리산에서 김종호>라는 한 줄 엽서를 우편으로 띄웠단다. 답장은 없었다. 1년 반이 지나 예비고사를 치르고 나서, 기약했던 만남을 실행에 옮겼다.

“우리 집은 화신리 정류장인데, 아내 집이 있는 수란리 정류장에서 먼저 내렸어요. 친구들이 왜 여기서 내리냐고 묻기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죠. 처가 대문 앞에 가니, 먼저 도착한 집사람이 장인어른에게 혼날까봐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척 밖으로 나오더군요.(웃음) ‘내일 읍내 오시오 빵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다음날 첫 데이트를 했어요.”

대학 3학년 때 첫사랑과의 결혼에 골인해, 김종호 사장은 동갑내기 아내 조문희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제가 삼성전자 사장이 되자 양가 친지뿐만 아니라 문당리, 수란리 어르신 모두가 자식 일처럼 기뻐해주셨어요. 소 한 마리 잡아 마을잔치도 했죠. 언제 가도 고향은 참 따뜻한 둥지 같아요. 동생 중호도 홍동면에서 농사짓고 있고, 조성을 홍동면장이 제 처남이에요.”


금탑산업훈장,
자랑스런 삼성인상 수상 영예


김종호 사장은 한국 전자·IT산업 발전과 국가 위상 제고에 기여한 공로로 2015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삼성전자가 연간 1억 대의 휴대폰을 생산하는데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06년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기도 했다.

“보람 있는 일이야 셀 수 없이 많죠. 베트남 휴대공급기지를 구축해 노키아를 꺾고 세계 No.1 입지를 굳혔을 때도 제조책임자로서 참 뿌듯했어요. 또, 기록·보관 문화를 정착시켜 삼성의 모든 휴대폰을 30년간 모아둔 것도 돌이켜 보니 큰 자산인 것 같아요.”

36년간 ‘삼성맨’으로 살면서 직업관도 점차 바뀌었다. 초기 10년은 ‘열정’이었다면,부장·상무 시절 10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부사장·사장이 되고서는 ‘겸손’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한국 최고의 기업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이끄는 리더로서, 김종호 사장의 변치 않는 경영철학은 ‘현장경영’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 사장은 생산공장을 직접 살펴 문제점을 찾고, 협력기업 관계자들과 만나 기술을 논의하는 현장파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1만여 곳의 현장을 찾아다녔어요. 연중 120일 이상을 할애해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전 세계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아이디어가 품질 혁신의 밑거름이 되기에 멈출 수 없었죠. 작년까지는 IT 분야 제조공장을 주로 다녔고, 올해부터는 섬유, 식품, 건설, 화학, 중장비, 생활용품 전 산업현장을 찾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삼성 혁신 노하우 전파

김종호 사장은 현재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지원센터를 이끌며 중소·중견기업 스마트공장 구축지원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2022년까지 중소기업이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인력양성 △기술확보 △특허개방 △판로개척 등 종합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중소벤처기업부와 매년 각 100억 원씩 향후 5년간 총 1000억 원을 조성해 국내 2500개 중소기업에 스마트공장을 확대할 방침이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50여 곳의 현장에 다녀왔다. 다각적인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역시 ‘품질’이다.

“잘못 만든 제품을 시장에 출시한 사람은 그 제품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괴로워서 다리 뻗고 잘 수 없다는 진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3현주의(현장에서 현물을 직접 보고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 근거해 품질을 집계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하고, 개선 노하우를 지도하고 있지요. 삼성전자의 축적된 제조기술과 노하우를 전파해 중소·중견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전자·IT산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홍동초등학교총동문회장 취임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김종호 사장이지만, 여가시간에는 못다 한 운동을 하며 건강과 행복지수를 끌어올린다. 올해부터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올해 안에 4개 영법을 모두 마스터하는 게 목표예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해요. 홍동초등학교 4학년 땐, 키가 작았는데도 6학년 형들을 한 명 빼고 달리기로 다 이겼죠. 홍성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소질을 눈여겨본 체육선생님 덕분에 육상부에 들어갈 뻔했어요. 부모님이 학업에 매진하길 원하셔서 육상의 꿈은 접었지만요.(웃음)”

김종호 사장은 지난 3월 홍동초등학교총동문회 총회에서 신임 총동문회장으로 선임됐다. 4월 28일 ‘제25차 홍동초등학교 총동문회 및 한마음 체육대회’를 통해 정식 취임한 김종호 홍동초등학교총동문회장은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지만, 모교와 고향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기회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헌신하겠다”고 취임 소회를 밝혔다.

“바쁘게 살다 보니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더불어 살면서 그동안 제가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나누고 싶어요. 예로부터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충절의 고장, 서해안 시대의 중심 ‘홍성’ 출신이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늘 응원해주시는 고향 분들에게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저도 고향을 더 자주 찾아뵙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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