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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특집>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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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특집>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1)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4.19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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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외교활동
 

홍성읍 출생, 신대한동맹회 박정래 회장, 이상만 총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임시의정원은 우리나라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 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렇게 출발한 임시정부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2월까지 27년 동안 정부를 구성하며 각종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임시정부의 사전 조직이며 입법부 역할을 한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각 지방의 한인 대표자 29명이 모여 구성해 출발한 후 몇 차례 개정을 거치며 국내와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지역을 대표하는 57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이같은 임시정부 요인, 임시의정원 중 임시의정원 의원 겸 국무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이상만이 홍성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역민은 많지 않다. 더욱이 1919년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자금 지원을 위해 결성한 신대한동맹회(新大韓同盟會) 박정래 회장과 이상만 총무가 홍성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고성은 홍성군 광리교회 목사(목원대 외래 교수) 연구 논문과 홍성제일감리교회사 등을 통해 밝혀진 이상만에 대해 임시정부와 의정원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상만은 홍성제일감리교회 목사 출신이다. 교회사를 전공한 고성은 목사는 이상만 목사에 대해 2000년대 초반부터 연구하고 있다.

이상만(李象萬)은 1884년 1월 5일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영암에서 태어났다. 홍성제일감리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 이상만은 1910년을 전후해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 운영한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해 목사가 됐다. 1912년부터 1917년까지 5년 동안 홍성제일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1919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때까지 당진군 이배면 원당리 예배당으로 옮겨 목회활동을 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후 4월 한국독립운동본부의 지령으로 홍성제일교회 유급 권사 이명제와 함께 중국 북경에 파견됐다. 이상만은 중국에 가자마자 신대한동맹회 총무를 맡았다.

신대한동맹회는 박정래가 북경시와 주변의 교민 20명으로 구성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최우 등과 조직한 단체다. 박정래는 1887년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5번지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만주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 누님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박정래 신대한동맹회 회장은 고향 사람으로 3살 위인 이상만에게 실무 책임자인 총무를 맡긴 것이다.

이렇게 홍성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해서 결성하고 운영하는 신대한동맹회 임원들은 1920년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 각 성을 순방하며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고 여러 나라의 승인을 얻기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1922년부터 39년까지 17년간 이상만의 행적은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했다는 증언들이 나오며 정동예배당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기독교 전도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만의 활동 흔적이 나타난 것은 1939년 임시정부가 유랑시기를 거쳐 사천성 기강에 도착한 후다.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13년간 머물다가 항주, 진강, 무한, 장사, 광주, 유주 등으로 유랑하다 기강에 자리잡았다. 이상만은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다. 1939년 10월 3일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의원을 확충하며 보권선거를 실시했는데 이상만을 포함해 홍진 등 5명이 선출됐다.

이상만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의원이었다. 임시정부와 의정원은 1940년 9월 중경으로 이동해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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