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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신문
  • 승인 2019.04.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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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과 화암사(華巖寺)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우리고장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오석산(五石山) 중턱에 천년고찰 화암사(華巖寺)가 있다. 화암사는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한 그의 집안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화암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사찰이라고 한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화암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 집안의 인연은 1752년(영조 2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8년에 작성된 「화암사중수건기(華巖寺重修建記)」현판에 기록된 절의 연혁에는,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며 1752년(영조 28)에 본관이 경주인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그의 아버지 김흥경(金興慶, 1667~1750)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절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화암사를 중건한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이다.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로 봉해진 인물이다. 김한신이 영조임금의 부마가 되면서 화암사 주변 토지를 별사전(別賜田)으로 하사 받아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사후에 화암사와 가까운 용산 앵무봉에 합장되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절이 심하게 퇴락하고 승려들이 기거하기조차 어려웠다. 1846년(헌종 12)에 또다시 경주김씨 일가에서 무량수각ㆍ요사ㆍ선실(禪室)ㆍ시경루(詩境樓)ㆍ창고 등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화암사에 머물며 공부한 적이 있으며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에도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 건물이 현재의 화암사이다.

화암사에는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루(詩境樓) 등의 편액이 있다. 이중에 무량수각 친필 편액은 수덕사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화암사 뒤편 오석산 암벽에는 친필각자인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소봉래(小蓬萊)’ 등의 암각문이 전해온다.

오석산 병풍바위에 새겨진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 옹방강의 집 대문 양쪽에 걸어놓았던 대련(對聯) 문구라고 한다. 이 대련은 ‘상견동파구거사(想見東坡舊居士)’와 ‘엄연천축고선생(儼然天竺古先生)’이라는 문구였다. 이 대련 중에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을 떠올려서 화암사 병풍바위에 유려한 행서체로 새겨놓았다. 이는 조선후기 소동파를 흠모하던 선비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구라고 한다.

또한 ‘시경(詩境)’ 암각문은 시의 경계 또는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풍취(風趣)’라는 뜻으로 좋은 경치를 뜻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자신이 존경했던 스승인 담계 옹방강을 상징하는 여러 문구들을 이곳 병풍바위와 쉰질바위에 새겨놓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스승인 담계 옹방강과 소동파를 모두 존경했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 선생이 추구했던 학문의 뿌리였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 오석산을 자신의 이상향 내지는 선경으로 생각하며, 그 흔적들을 남겨놓은 것 같다. 이 암각문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 되었다.

한편 화암사에서 1.5킬로미터 지점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택(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이 있다. 이 고택 주변으로는 김정희 산소와, 화순옹주 열녀문, 화순옹주와 김한신(金漢藎)의 합장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 등이 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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