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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39>에르나 크누첸-피의 미세한 언어, ‘스페셜티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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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39>에르나 크누첸-피의 미세한 언어, ‘스페셜티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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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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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미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모든 생명은 모국어를 가진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제 나름의 정체성이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공중에 나는 새도, 모두가 성장한 시간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든다. 거기엔 자라온 환경이 있고 길러낸 햇살이 있으며 스치듯 지나온 바람과 구름, 그리고 유전자가 있다. 이 땅의 인류가 7천여 언어를 모국어 삼아 살아가듯, 이 땅의 생명 또한 자신이 자라온 환경을 모국어 삼아 성장하는 것이다.

커피 또한 마찬가지다. 적도를 중심으로 서식하는 모든 커피들은 모국어와도 같은 제 나름의 향미를 가진다. 남미에서 아프리카, 중동과 아시아에 이르는 50여 나라 커피 맛이 모두 다른 건, 서로 다른 토양과 환경에서 자라난 때문이다. 그늘 재배된 커피가 과일처럼 달고 화산 지대의 커피가 깊은 향을 내는 건, 토양과 환경이 부여한 제 나름의 모국어다. 이렇듯 서로 다른 커피의 모국어는 다양한 환경을 통해 형성된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로 대별되는 커피 품종과 경작지의 높낮이, 토질과 구름과 강수량과 일교차, 그리고 경작하는 농부의 손길이 모여 마침내 커피의 면모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커피의 풍미는 너무도 다양하다. 마이크로 랏(micro lot)이라 불리는 지극히 작은 농장 하나가, 동일한 맛과 향을 내는 최소한의 공동체인 탓이다.

스페셜티 커피가 탄생한 건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이방의 풍미 따윈 섞이지 않은, 순도 백퍼센트의 모국어로 된 커피, 그것이 바로 ‘스페셜티 커피’인 것이다. 그것은 인스턴트 커피나 프랜차이즈 커피에선 꿈꿀 수 없는, 맛의 혁명이었다. 와인이 포도밭의 토양과 기후, 경작자의 열정이 섞인 떼루아(terroir. 재배지의 자연 조건)를 중시했듯, 커피 또한 토질과 기후, 경작자의 열정을 거론하며 커피의 향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커피 현대사의 신화, 에르나 크누첸 여사를 통해서였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크누첸 여사는 스페셜티 커피라는 개념을 창시하며 커피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커피 맛에 눈 뜨기 시작한 197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생두회사 직원이었던 그녀는 미(美) 서부 일대 로스팅 가게에 커피를 납품하며 생두의 특성을 분석했고, 아로마와 바디, 산미와 플레이버로 커피를 평가하는 현대식 커핑 기법을 개발하며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역사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미국 커핑 업계의 홍일점이었던 그녀는 커피 산지를 찾아가 직접 생두를 구매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차리며 질 낮은 미국 커피시장에 최고급 생두를 유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페셜티 커피란 개념을 창시했다. 1974년, <차와 커피>란 잡지의 기고문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정의한 스페셜티 커피란, ‘미세 기후에서 자란, 최고급 향미를 가진 커피’ 였다. 작은 것에 민감할 때 더욱 풍성해지는 인간의 심성처럼, 바람과 구름과 먼지 같은, 미세한 기후에 반응하며 더욱 풍성한 향미를 키운 커피였다. 그것은 프랜차이즈 커피가 가진 획일화와는 너무도 다른 세계였다. 자연이 모국어로 키워온 모든 향미들, 바람과 구름과 햇살, 심지어 달과 별이 가져다주었을 그 모든 향미를 한 잔의 커피에 담아내려는 노력이 마침내 커피에 스페셜티란 이름을 달아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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