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9:47 (금)
“살아나온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상태바
“살아나온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 guest
  • 승인 2019.03.03 1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 이야기 구항면 청광리 청광마을<1> 살아있는 역사책, 이완순 할머니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성 지역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고 걷기 좋았던 9월의 날들. 청광마을을 들어갈 때마다 뚜벅이 여행자가 된 듯 자유롭게 거닐었습니다. 많은 주민분들이 늘 반갑게 맞아주셨고 집, 마을회관, 논밭, 나무그늘 아래 등 여러 자리에서 편안히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살아나온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살아있는 역사책, 이완순 할머니

 

메말라있던 땅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고 난 9월의 어느 날, 멋스럽게 지어진 집 앞 마당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따스한 가을 햇볕 아래에서 만난 이완순(86) 할머니.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 편히 앉으라며 의자를 건네신다. "마을에 대해서 아는 거는 워디 가지 않고 오지 않으니께 잘 모르고 나 살아나온 거는 연태 이적지 살은 거지.

" 완순 할머니는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던 인생 이야기를 덤덤히 시작한다. 이곳에 온 지 7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친정집을 떠나오던 그날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전시에 걸어서 시집와갖고 살아나온 그 얘기를 허자면 한도 읎어. 그땐 가마도 못 탔다니께. 갑자케 오느라고. 새벽에 걸어왔어.”

군인이었던 남편이 열흘간 휴가를 나왔을 적에 서둘러 올린 결혼식. 혼례를 올리고 고작 이틀 밤을 지새운 뒤 남편은 다시 부대로 떠났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휴전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온전히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동안 완순 할머니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한 세월을 보냈다. 농사, 장사, 길쌈 등 안 해본일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고달프고 어려웠던 일은 광산일이었다.

“다래울에 색면광산이 있었는디 어지간한 사람은 광산 대니지도 않고 인저 생활력 어렵고 좀 째고 허는 사람만 대녔지. 그때는 젊었으니께 어려운 줄도 모르고 산 넘어갔다 넘어오고 아침저녁이루 그렇게 혔는디 지끔은 밭이도못 가. 밭이두 어려워(웃음).”

청광마을에서도 좁은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야 있는 산골짜기 동네, 다래울. 뒷산에 푸른빛의 돌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일제강점기 때 그 일대가 전부 석면광산으로 개발되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이곳저곳 다른 마을 사람들도 광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몇 십 년간 광산의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돌막을 굴이서 파내오믄 망치로 깨쳐서 색면을 골러서 담았지. 돌막은 내삐리고. 하얀 색면 빤질빤질허니 그 놈을 인저 기계다 빵궈가지고 솜허고 섞어가지고 자서서 토생이 해서 허믄, 그걸로 이런 거 저런 거 다 모든 걸 맨드는 거더먼 그려. 가빠 같은 거, 방아 찧는 피대 같은 거나 별거 별거 맨들으니께.”

어릴 적부터 해오던 농사일과는 또 다른 일. 매일 아침 광산에 가기 위해 산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오후까지 일하고 나면 두 손과 온몸이 하얗게 변하곤 했었다. 온종일 서서 일하니 다리도 퉁퉁 부었다.
“밥 싸갖고 가믄 도시락이 얼어. 얼으면 그 탄 위다가 올려놨다가 미저근허면 점심 먹고. 겨울에 눈이 와도 가고.”


늘 고단했지만 그럼에도 쉴 수 없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들, 고이고이 낳은 자식들까지 먹을 입을 나누는 식구들이 많았기에. 밤에는 길쌈하랴, 틈틈이 농사일 도우랴, 시댁 식구들 식사 준비하랴, 아이들 키우랴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네 시대는 낮잠 잘 새가 워디가 있어. 저녁에도 온잠을 못 자고 살아나왔지. 애덜하고 워쳐게라도 살라고 그렇게 헌기지.”완순 할머니는 그 시절을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살아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컴컴하고 깊은 터널을 걷는 것처럼 참 지독하고 어려웠다고. 삶의 한자락을 차지했던 광산에서의 시간은 30여 년 전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막을 내렸다.

“지끔은 행복허게 사는 거지. 따지면, 이전에다 대면. 안 헌 거 없이 다 해보고.” 때로는 먼저 간 남편이 그립기도 하고, 지난 시절 자신보다 자식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사무치듯 더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작년부터는 큰 아들이 내려와 곁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어 외로움도 덜하다.

“얼마 전에 티브이 보니께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자기 살은 얘기를 허데. 나도 저런 데 나가서 얘기허믄 할 얘기가 많을 텐디 싶기도 허고. 핵교를 못 나오고 못 배워서 얘기를 못 헐라나?”

어느덧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 식물로 치면 통통하게 영근 씨앗을 떨어트리는 때와 같지 않을까. 잘 여문 씨앗처럼 할머니가 몸소 살아낸 세월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이 빛이 난다.

할머니,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문수영, 주란)


<대상마을 모집>
마을조사 및 마을책자 제작에 함께 할 마을을 모집합니다.
△대상 :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하지 않은 마을
            마을자원 발굴 및 마을책자에 관심이 있는 마을 
△ 연락 : 홍성군 마을만들기 지원센터(041-635-150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