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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나라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3> 장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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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나라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3> 장곡면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9.03.03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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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500명 태극기 휘날리며 면사무소 습격

장곡면 3·1독립만세운동은 군내에서 가장 많은 500 여명의 평범한 주민이 참여한 점과 주민들이 당당하게 면사무소 앞에 몰려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면사무소를 파괴한 점, 화계리 윤씨 일가의 독립운동사 등이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특징이었다.

1994년 3·1절에 조성한 장곡3·1운동기념공원에 국가보훈처에서 세운 현충시설(관리번호 23-1-06) 표지판과 기미삼일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고 김갑현)에서 비각에 새긴 창의기, 2010년에 발행한 장곡면지 내용을 재구성 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인 장곡면 출신 윤익중은 1919년 3월1일 홍성 출신 한용운을 비롯해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는 독실선언문 선포식과 서울시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선언문 100여 매를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곡에서 윤태영, 김상호, 김동성, 최석환, 서갑용, 한상철 등 30여 명의 동지들에게 서울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장곡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10여 일 간 은밀한 회합을 거쳐 면내 각 마을마다 조직책을 선발하여 인원동원, 물자와 자금 조달 등 계획을 분담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4월 1일 밤 면내 모든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려 거사가 준비됐음을 각 마을에 알렸다.

4월 4일 밤, 화계리, 광성리, 신풍리에서 규합된 주민 100여 명이 매봉산에 올라가 오수남의 타종을 신호로 봉화를 올리고 풍물을 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200명 체포 홍성경찰서 압송

이 후 면내 전역에서 간헐적인 항일시위가 계속됐다. 4월 7일 도산리 뒷편 매봉재에 300여 명이 모여 북을 울리면서 만세소리로 장곡면을 진동시켰다. 저녁 8시경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면사무소 앞에서 한상철이 일제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문 취지 낭독을 한 후 주민들의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퍼졌다. 면사무소 직원들도 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에응하지 않고 도망가 사무소를 비우자 격분한 군중은 김동하의 선두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서류와 건물 기둥, 기물들을 부셨다.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비석에 새긴 창의기에는 성난 군중이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렸다고 돼 있으나 다른 자료들에 방화 기록은 없다.

일제는 무장 군경을 급파하여 총격을 가하며 사태 진압에나서 현장에서 2명이 부상당하고 11명이체포됐다. 다음날까지 200 여명을 체포,홍성경찰서로 압송했다.

장곡 3·1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주민은 10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대부분 500 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에는 장곡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19명이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장곡면사무소에 보관 중인 수형인 명부에는 이들 외에 17명이 더 확인된다.

따라서 공식적 기록에 의한 확인자는 36명이다. 1994년 면사무소 뒷산에 조성한 기년공원 기념비에는 125명이 새겨져 있으나 이중 일부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잡범이라고 이의를 제기해 논란이 일었다. 하여튼 어느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장곡면민 500 여명이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해 역사를 이어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한편 장곡면 독립운동 유족회(회장 한대규 대전시 대덕구 두승무역 대표이사, 장곡면사무소 앞에서 일제 만행 규탄 연설을 하며 선동한 한상철 손자)는 해마다 4월 3일 3·1만세 시위를 재현하며 기념공원 비각에서 제향을 올린다.

화계리 윤태병 아들 3명이 주도

장곡면에서 이렇게 군내 최대 인원이 가장 격렬하게 시위운동에 나섰던 배경이 있다. 장곡면 화계리 윤태병은 슬하에 윤형중, 윤익중, 윤낙중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3형제와 당질관계인 윤의석까까지 모두 3,1운동에 앞장 서서 참여했다.

둘째 아들 윤익중은 1919년 서울 휘문고 졸업반으로 독립사상 고취와 선전을 목적으로 김상옥이 조직한 지하단체 혁신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후 만주의 비밀항일투쟁단체 의열단에서 운동하다 체포되어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년 4개월 만에 가석방된 그는 김상옥, 이혜수 등과 군자금 모금을 계속하다가 종로경찰서폭탄 투척사건에 연루돼 1923년 10월 다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80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윤익중의 형 윤형중은 장곡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았다. 막내 윤낙중은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와 형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윤의석은 장곡면사무소 습격 등에 앞장 서다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에게 애족장을 추서했다.

윤씨 형제와 같은 화계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이밖에도 한상철, 김용제, 이화춘, 김동완, 이문재, 윤만수, 최기석, 최재선, 이성근, 이철림, 김차제, 김동운, 윤기섭 등이 있다. 공식적으로 활동 내용이 확인되는 36명 중 64%인 23명이 화계리 출신이다. 죽전리, 지정리, 광성리 주민 참여도가높았다는 점은 화계리와 가까운 지역으로윤씨네 형제들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광성리에는 김용숙, 지정리 김동준,가송리 김동하가 앞장 선 인물들이다.
장곡 정치, 경제, 사회 역사적 배경장곡면은 올 2월 1일 현재 인구가 3011명으로 군내에서 은하, 결성에 이어 3번째로 적은 오지면이다. 그러나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국세조사보고’ 자료(장곡면지 168쪽)에 따르면 장곡면은 홍성군에서 부유하고 살기좋은 중심지였다.

그해 장곡면 인구는 9542명으로 홍동 1만438명, 홍성 9681명에 이어 세 번째 많은 인구가 살았다. 9156명의 광천보다 인구가 많았다. 직업별로는 장곡면 농업 인구가 3120명으로 홍동면 3575명 다음을 차지했다. 장곡면에는 6개나 되는 탄광 덕분에 넉넉한 생활을 했다.

더 오랜 역사는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적이 군내에서 제일 많아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갖췄으며 백제 부흥운동의 수도 주류성이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많은주민이 참여해 가장 격렬한 3·1독립만세운동을 벌여 홍성군의 지도적 위치를 점유했던 배경은 이같은 정치, 경제, 사회적 역사와 무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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