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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항 3·1만세운동 모의했던 ‘안둥지’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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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항 3·1만세운동 모의했던 ‘안둥지’ 계곡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9.02.27 2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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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나라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4>

올해가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다. 100년 전에 우리고장 홍성 곳곳에서도 3·1독립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100년 전에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의 발자취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장소가 있다.

▲ 구항 만세운동_서은모 선생 독림운동 기념비

우리고장 홍성군 구항면 대정리 마재마을에는 ‘안둥지’ 라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이곳은 광천읍과 구항면의 경계를 이루는 지기산(해발 320m) 동쪽 산줄기 끝부분이다. 옛날 지기산 기슭인 마재마을에서 은하면 장곡리 월곡마을로 넘나들던 길목 부근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에 마재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서은모(徐殷模) 선생이다. 당시에 서은모 선생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안둥지 계곡에 30여 평의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파놓았다. 이곳에서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변 지역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안둥지 구덩이로 들어와 숨어 있었다.

당시에 만세운동을 펼치며 이웃끼리 사용하던 암호가 ‘안둥지’였다. 안둥지라는 암호가 전달되면 마을사람들은 구덩이 안으로 달려와서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그 당시에 사용하던 ‘안둥지’라는 암호는, 이후로 이곳 산 계곡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 구항 만세운동_송전탑이 세워진 안둥지 자리

일본경찰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마을주민과 모의장소를 찾기 위해 마재마을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일본경찰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만세운동 참가자와 안둥지를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일본경찰은 마을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던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사탕을 사주며 모의장소를 물었다. 결국 10살짜리 어린아이 한 명이 사탕 몇 개에 일본경찰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른들이 들락거리던 안둥지를 가르쳐주는 바람에 비밀장소가 탄로 나고 말았다.

일본경찰의 꾐에 넘어갔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마을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이후 안둥지는 더 이상 독립운동의 비밀장소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일본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서은모 선생이라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다.

서은모 선생은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본경찰에 여러차례 끌려 다니며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웃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서은모 선생이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관계로, 현재는 마을에서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을 확인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당시에 서은모 선생은 기거하던 본가에 아래채를 크게 지었다. 아래채에는 낯모르는 과객들이 찾아와서 묵어가곤 했다. 광천 덕명초등학교 설립자인 서승태 선생을 비롯하여 주변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찾아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였던 본가의 본채는 현재 빈집으로 남아있고 아래채는 1970년대에 헐렸다.

▲ 구항 만세운동_서은모 선생 생가

서은모 선생의 공적이 정부 기록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5년이다.
2005년 여름에 국가보훈처 직원이 마재마을로 후손을 찾아왔다. 국가보훈처 직원은 서은모선생의 만세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마재마을에는 서은모선생의 손자인 서광철(80세)씨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서광철씨는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들려주며 안둥지 등을 직접 안내하였다. 이러한 공적들이 인정되면서 2005년 11월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포상이 추서되었다.서은모 선생은 1884년 5월 27일(음력)에 태어나서 1936년 6월 9일에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3·1독립만세를 외치며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지만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해방후에 안둥지 벙커는 아무런 보전대책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었다. 나무꾼들이 쉬어가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노름꾼들이 비밀리에 노름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아예 안둥지 벙커가 사라지고 없다. 이 자리에는 2011년에 고압선 송전탑이 설치되었다. 서광철씨 등 마을주민들이 뒤늦게 알고 찾아가서 항의했지만 한창 진행된 공사를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 구항 만세운동_서은모 선생 산소

시공사 측에서는 대안으로 송전탑을 세운 안둥지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고 주변경관을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주기로 했다. 또한 마을회관에 서은모 선생의 독립운동비를 세워주기로 했다.

시공사는 약속대로 송전탑을 완성한 후에 석축을 쌓고 주변 정리를 잘해놓았다. 마을회관 앞에 서은모 선생의 독립운동비도 세워놓았다. 하지만 안둥지 표지석을 세워주겠다는 약속은 아직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

뒤늦기는 했지만, 안둥지를 잘 정비하고 서은모 선생이 살아생전 살았던 본채와 아래채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잘 보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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