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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나라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의 백성들(1)-홍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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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나라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의 백성들(1)-홍동면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9.02.07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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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서도 이름없는 평민들이 역사 만들어

우리민족의 해방과 독립의 기초가 됐던 1919년 3·1운동의 주체가 지식인 그룹인 선각자인가 민중인가 하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홍성 3·1운동의 주체는 농민 중심의민중이었다.

지식인들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낭독, 배포, 주민 조직과 동원 격문 제작과 부착 등을 주도하고 민중은 만세, 봉화, 풍물 시위, 경찰서 혹은 면사무소 습격 등 행동에 나서 상호 조화를 이룬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홍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농민을 중심으로 무명의 백성들이 해냈다. 역사가 이름 없는 평민들의 용기에 의해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00년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홍성의 무명의 백성들의 족적을 찾아 지역별로 나눠 연재한다. <편집자 주>


탈옥 후 6년간 도피한 조용준 증언
1919년 3월 4일 저녁 해가 오서산으로넘어가자 홍동면 신기리 만경산 꼭대기공동묘지에 신기, 금당, 수란, 팔괘, 구정리 주민 37명이 모여 횃불을 밝히며 2시간 가량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가장 나이 어린 조용준씨(21세, 수란리)가횃불을 잡았다.

집단 불이 꺼져가 새 단에옮겨 붙이려고 내리자 가장 나이 많은 성낙붕(58세, 신기리)씨가 그 불에 담배를붙이려는 순간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왹’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일본 헌병들이 바위 틈에 숨어있다 일제히 공격한 것이다.

조용준씨 겨드랑이 사이로 날아간 총탄에 성낙붕씨가 정면으로 맞아 숨졌다. 중상을 입은 이희도씨(신기리)는 다음날 아침 죽고 안진호씨는 팔을 잘리웠으며 이석만씨는 목에 총탄이 통과했으나 살아났다. 당시 임연상 홍성군수는 사전에 만세운동낌새를 알아채리고 300명을 동원 군내 여러곳에배치해놓고 있었다.

압록강 건너다 일헌병 때려눕혀
다음날 홍성경찰서에 잡혀간 사람들은 59명이었다. 왜병들은 잡혀온 사람들의 옷을 벗겨 널판지 3군데에 묶어놓고 30대 내지 60대의 곤장을 치며 구두발로 짓밟았다. 피가 솟고 배설물이 흘렀다. 이하영이라는한국인순경은매를약하게치며귓속말로엄살을 피우라고 하다 들켜 그도 매를 맞고 헌병에 넘겨졌다. 첫날은 60대를 맞고 다음날부터 매일 30대씩 맞았다.

조용준씨는 8일만인 12일 탈출했다. 한국인 순사 김용재가 밥을 주느라 문을 열자마자 그를 차버리고 튀어나왔다. “야 이 자식아 도망가려면 조용히 도망가. 이렇게 차지말고”하며 제지하지않았다. 그래서 그도 뒤에 처벌을 받았다. 조용준씨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쳐 40일만에 압록강 다리를 건넜다.

막차가 지나간 다음 밤 열두시 경 압록강 철교를 기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의 건너가이제 살았다고 생각됐을 때 앞에서 갑자기 커다란전지 불빛이 앞을 가렸다. 이제 죽는구나, 고기값이나 하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조용준씨는 갑자기 엎드려 큰 돌맹이를 하나 집어 던져 쓰러트리고목을 두어번 밟은 뒤 뛰어서 건너가 갈대숲으로 숨었다.

산으로 산으로 감자를 캐어 구워 먹으며 용전촌으로 들어갔다. 한국인 전주이씨 집에서 며칠묵었다. 하루는 주인과 함께 일본인 술집에 가서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술집 주인이 자꾸 신분을캐물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나왔다고 대답했다. 옆에 앉은 중년 부인이 발을 건드리며 아랫목을 보라고 눈짓했다.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화장실 간다고 나와 그쪽을 살려보니 헌병 구두가 보였다.
그길로 도망쳤다.


뒤에 들으니 그런식으로 잡혀가 죽은 사람이 40명이 넘는다고 했다.조용준씨는 화태란 곳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도일본 헌병들이 노랗게 깔려있었다. 김좌진 장군을찾아가려고 마음 먹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도 없고너무 험난할 것 같아 조사가 거의 없다는 일본 북해도로 건너갔다. 거기는 살만했다. 좌하연 이란곳에서 노동 품을 팔아 여비를 장만해 고향 홍동으로 돌아왔다.

스물 일곱살이었다. 6년 동안 도망다닌 것이다. 이상은 조용준씨가‘홍동소식’1986년3월호 인터뷰와 1989년 3·1운동 70주년을 맞아홍성신문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내용들이다. 그후조용준씨는 90세가 넘어 1991년경 사망했다.

홍동노인회는 면사무소 뒷산에 기미년 만세운동을 하다 희생된 55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1978년 홍성군의 지원으로 비각을 세우고‘삼일각’으로 이름 붙였다.

▲ 홍동면사무소 뒷산에 세워진 삼일각.


거사 한달 전부터 준비
김삼웅 전 독립기겸관장은 최근 오마이뉴스에 올린‘현대사’연재 글에서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시위는 3월 2일부터 전국으로 확산돼 5월말까지 3개월 동안 총 200만 여 명이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홍동면에서 비교적 빠른 시기인 3월 4일 시작한이유에 대해 조용준씨는 사전에 그만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소상히 밝혔다.

만경산 현장에서죽은 성낙붕은 원래 아산군 도고면에 살던 중 삼촌이며 천안지구 의병대장인 성원영, 성달영으로부터 홍동지구 독립운동에 관한 책임을 지시받고 2월부터 신기리로 이사왔다. 참나무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중 마을에서 한명교를 만나 뜻이 통해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신기리 이희도는 거사 4년전인 1915년 서울에 올라가 애국지사들을 만나고귀향해 박상진, 박재욱 등과 동지로 규합했다. 1918년 고종황제 승하 소식을 들은 그는 다시 상경해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오다가 온양에서 태극단을 조직해놓고 홍동에 와서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홍동의 선각자들이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20세 김순이란 아산 사람이 천안을 오가며 각종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조용준씨는 말했다.

증언과 다르게 기록한 홍동면지
2017년에 발행한 홍성군지와 같은 해에 펴낸 홍동면지의 3·1운동에 관한기술은 3월 7일 홍성읍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그러나 1994년판 홍동면지는 3월 5일 홍동면 신기리 만경산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지만 만경산 만세운동 당시 직접 횃불을들었던 조용준씨는 3월 4일 저녁이라며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또 홍동면지는 이희도와 한명교가 현장에서 죽고 성낙붕은 고문의 여독으로 뒤에 사망했다고 기록했으나 조용준씨는 성낙붕이 현장에서죽고 이희도가 뒤에 사망한 것으로 다르게 말했다.

홍동면지는 또 삼일각 위치를 가장 높은 지대로사방이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비각 건립을 주도한 고 이창우 전 홍동면노인회장은 해방되면서 일본 천황을 경배하는신사를 때려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운동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비석을 세웠으며 그런 사연을 적은 문서를 비닐봉지에 담아 비각밑땅속에 묻어두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로부터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받은 홍동의 독립운동가는 이희도 황윤성 이강인 정진우 최명용 최중식 6명이다. 3·1독립만세운동을 하다희생된 성낙붕, 조용준, 한명교, 이석만, 안중호 등은 공식 애국장이나 포장을 받지 못했다. 직계 자손이 없거나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 홍동면노인회 주관으로 매년 3월 1일 삼일각공원에서 3·1절 기념 추모제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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