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홍주목사 박승휴의 효심과 인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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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홍주목사 박승휴의 효심과 인절미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9.01.29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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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휴 효자 정려

1657년을 전후하여 제245대 홍주목사를 지낸 박승휴(朴承休, 1606∼1659)는 효행이 매우 뛰어난 효자로 알려졌다. 그의 효행을 알리는 정려가 우리고장 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국도변에 서있다.

 박승휴의 효행담이 「광시면지」와 「홍주목사 천년의 역사를 말하다」 편에 재미있게 전해오고 있다.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조임금은 부랴부랴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했다. 이괄의 반란으로 임금 즉위 1년도 안되어 한양을 떠나 공산성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인조반정 과정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내부 반란으로 도성이 점령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인조임금이 공주로 피신하는 도중에 민가에서 콩고물을 묻힌 떡을 만들어 대접했다. 먼 길을 달려오던 인조임금은 시장한 참에 떡을 맛있게 먹었다. 맛있는 떡으로 배를 채운 임금은 떡 이름이 궁금했다.

 “이 떡 이름이 무엇인고?”

 그러나 떡 이름을 아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서 진상한 것만 알 뿐이었다.

 “허허, 그렇다면 임씨가 만들었고 맛이 아주 뛰어나므로 ‘임절미(任絶味)’라고 하면 좋겠구나.”

하였다. 이렇게 떡 이름은 임절미가 되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의 발음이 변하여 인절미가 되었다는 유래담이 전해온다.

▲ 박승휴 효자 정려 중수비

인조임금이 공주로 피신할 당시에 박승휴의 아버지 박안행은 공산성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었던 것 같다. 임금님이 찹쌀로 만든 인절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집에 연락하여 인절미를 만들어 갖고 오라는 연락 했다.

 연락을 받은 박승휴는 솜씨 좋은 부인에게 인절미를 만들도록 했다. 밤새 부인이 정성껏 만든 인절미를 들고 새벽녘에 집을 나서서 공주로 달려갔다. 백리 길을 정신없이 달려서 공주 공산성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는 아침 무렵이 되었다.

 박승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공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아버지 박안행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서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저어…….”

 아버지 박안행은 아들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아들이 정신없이 뛰어온 것을 알면서도 짐짓 꾸중하는 말을 먼저 꺼냈다.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릴 인절미를 기다리느라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박승휴는 뒷머리만 긁적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아들 박승휴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인절미를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아버지의 마음을 백 번 천 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아마도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는 말은 이런 때를 빗댄 말일 것이다. 아버지 박안행은 인절미를 기다리는 시간이 삼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인조임금은 공산성으로 피난 와서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입에 당기지 않았다. 나라 안이 반란으로 불안하므로 입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입에 대는 음식은 색다르게 먹어보는 인절미뿐이었다.

 아버지 박안행은 임금님이 아침 수라상에서 인절미를 맛있게 먹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성문 앞에 서있는 아들 앞으로 걸어왔다.

 “내일은 좀 더 일찍 와야 한다. 며칠 전에 담가놓은 술독에 용수를 박고 찹쌀이 동동 뜨게 술을 정성껏 떠갖고 오거라.”

 “예, 아버님.”

 박승휴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공손히 인사한 뒤에 다시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왔다.

 다시 백여 리 길을 달려서 집에 도착하면 저녁 무렵이었다. 아내와 함께 다시 안방 아랫목에 담가놓은 술독을 조심조심 열어보았다. 맛있게 익어가는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내가 다가와서 술독 안에 조심조심 용수를 박아놓았다. 용수 안으로 빗 좋은 맑은 술이 콸콸 흘러들어갔다.

 박승휴는 용수 안에 고인 맑은 술을 떠서 병에 담았다. 아내는 찹쌀을 솥에 찌고 메질하여 떡을 만들고 콩고물을 묻히며 인절미를 만들었다. 이튿날 새벽에는 술병과 인절미를 들고 다시 공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공주 공산성

박승휴는 인조임금이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에 계속 인절미와 술을 빚어 날랐다. 입맛을 잃은 인조임금은 인절미와 맛있는 술로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 인조임금이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에 이괄의 난이 평정되어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인조임금이 한양으로 떠나며 입맛을 달래주던 인절미와 맛있는 술은 박승휴가 만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박승휴가 매일같이 왕복 이백리 길을 달려와서 아버지와 임금의 안위를 위해 애쓴 것을 알고 감동받았다. 박승휴의 효성과 충의를 높이 사고 효자상을 내림으로써, 이곳에 박승휴 효행정려가 서게 되었다.

 한편 공주 공산성에는 인조임금이 피신하여 머물던 곳에 ‘쌍수정(雙樹亭)’과 두 그루 나무가 서있다. 또한 쌍수정 아래에 인절미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도 서있다.

 박승휴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거처하는 방 쪽을 한 번도 등져 앉거나 등져 누워본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서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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