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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김좌진 장군의 순국장소 ‘산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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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김좌진 장군의 순국장소 ‘산시진’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9.01.1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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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정미소 내부 모습(비석 세워진 곳이 순국지점임)

우리고장 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청산리전투는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대첩이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의 백운평‧이도구‧갑산촌‧천수평‧어랑촌‧만록구‧고동하 계곡을 옮겨 다니며 싸웠다.

우리 독립군들은 10배가 넘는 일본 정규군과 싸워서 1천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2천명 내외의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2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무렵에 일제는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계략을 실현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해 북간도에서 큰 세력을 가진 마적단을 매수했다. 1920년 10월에 마적단을 시켜서 훈춘지역에 있는 일본의 영사관을 침입하게 했다. 이 침입자들 속에 독립군이 섞여있다는 억지를 써서 자기 나라 국민을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어 북간도 방면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다.

▲ 금성정미소 연자방아 모습

독립단체들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독립군의 근거지를 백두산 부근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러한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과정에서 일본군과 마주치면서 벌인 전투가 청산리 전투이다.

김좌진 장군이 중국에서 양성했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 승리의 주력 부대였다. 장군은 1917년 9월경에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 북로군정서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장군은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취임하고, 북로군정서 안에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이는 북로군정서의 당면과제인 독립운동 정예군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훈련시킨 부대가 청산리 전투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 복원된 순국지 모습(가운데 초가집이 살던 집이고 맨 오른쪽이 금성 정미소임)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전투 이후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장소는 중국 해림시 산시진이다. 산시진은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서쪽에 위치해 있다. 산시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철도가 통과하며 비옥한 황무지가 많아서 농토개간에 유리한 지역이다.

더욱이 산시진 남쪽에는 만 여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립군 병력의 보충과 군자금 조달 및 무기구입 등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아마도 이런 조건들이 김좌진 장군이 산시진에 정착한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군은 독립운동을 하며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동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현재 해림시에 있는 조선족해림실험소학교는 당시에 세웠던 학교의 명맥을 잇고 있다.

▲ 김좌진 장군 흉상 모습

당시에 산시진 도남촌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가 있었다. 정미소 주인은 한국동포들에게 벼를 도정하는데 비싼 수수료를 요구했다. 김좌진 장군은 동포들의 경비절감을 위하여 1929년에 정미소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장군은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교육과 경제 문제까지 보살핀 지도자였다.

장군은 안타깝게도 자신이 운영하던 금성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이때가 장군의 나이 41세인 1930년 1월 24일이다.

장군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조국독립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있는데……, 조국이 광복되는 날은 언제일지 끝도 보이지 않는데…….”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산시진 가로수 길

장군의 장례식은 성대한 사회장으로 거행하였고 유해는 산시역 부근 산언덕에 안장되었다. 1934년에 부인 오숙근여사가 방물장수로 가장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고국으로 운구해 왔다.

고국으로 운구된 장군의 유해는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일경의 눈을 피해 밀장하고 비밀에 부쳐졌다. 1957년 2월 14일 오숙근여사가 사망하자 밀장지에서 다시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하여 부인과 함께 합장하였다.

장군이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순국지가 1999년에 복원되었다. 김좌진기념사업회에서 순국지 복원사업을 할 때의 일화가 전해온다.

당시에 장군이 생활하던 집은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회의 장소를 겸했다. 당시에 살던 집은 이미 허물어져서 본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옛 장소에는 순국지를 복원할 형편이 못되었다. 옛 순국지에서 북쪽지점으로 80미터쯤 옮겨서 순국장소인 금성정미소와 살던 단층 초가집을 복원해 놓았다. 또한 장군의 흉상도 순국지 앞 광장에 세워놓았다. 흉상은 장군의 담대하고 호방한 기상이 물씬 풍겨나는 모습이다.

▲ 순국지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모습

김좌진기념사업회에서 장군의 순국지를 찾아 나섰을 때, 이를 증명하는 가장 큰 단서는 연자방아였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던 정미소와 옛집 등 순국장소는 폐허가 되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역 노인들의 증언을 참고삼아 주변을 파내던 중에 연자방아가 발견된 것이다.

연자방아에는 대종교를 상징하는 원방각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종교는 장군이 국내에서 대한광복단에 가입하면서 마지막까지 믿었던 종교이다. 김좌진기념사업회에서는 장군이 신봉했던 대종교 문양을 보면서 순국장소라는 확신을 얻었다.

연자방아는 그곳에 다시 묻어두고 되돌아왔다. 이후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묻어두었던 장소에서 연자방아를 찾았다. 그러나 연자방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현지인 중에서 누군가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몰래 가져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연자방아를 찾지 못하고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연자방아의 행방을 찾던 중에, 20여년이 흘러간 2015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연자방아는 장군의 흉상이 세워진 바로 옆에 모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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