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가 부활된 지 23년째다. 처음 지방자치가 도입된 것은 1949년이지만, 1962년 박정희 군사쿠테타로 국회와 지방의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1기 지방자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91년 기초의원을 주민의 손으로 뽑게 되면서 다시 부활했고, 4년 뒤인 1995년에 자치단체장까지 주민이 직접 선출하면서 지금과 같은 지방자치제도의 틀이 완성된다.
이렇게 민선 자치시대가 막을 올린 지 23년째를 맞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지방자치를 왜 하냐”, “지방자치해서 좋아진 게 뭐냐”며 냉소하고 혐오하고 빈정거리는 주변 분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민선 1기부터 6기까지 선거법 위반과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단체장이 모두 364명, 선출된 단체장(1474명)의 24.7%에 달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은 지방자치의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지방자치제도가 잘못 설계된 탓이 크다. 사실 우리 지방자치는 출범할 때부터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치를 위한 근거로 지방자치법을 만들면서 지방의 참여도 없이 중앙관료들이 뚝딱했다. 풀뿌리로부터 쟁취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기에 시혜적으로 이뤄졌다.
실질적인 분권도 없었고, 기본적인 주민참여제도도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무늬만 자치’인 비정상적인 지방자치제도로 수 십년 동안 버텨온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설계의 잘못들을 지난 20년 이상 계속 지적해 왔음에도 전혀 바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라는 표현부터가 반쪽 출발을 예고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부, 지방자치법 개정안 발표
그나마 다행일까. 지난 10월 29일, 여섯 번째 ‘지방자치의 날’을 맞아 행정안전부가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을 발표했다. 1988년 이후 30년 만이다. 올초 개헌을 통해 하려다 하지 못했던 것 중에 법령을 바꿔서 할 수 있는 건 해보자는 취지란다. 그 핵심은 주민주권 확립을 통해 실질적인 지역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자치단체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며, 중앙과 지방을 협력적 동반자 관계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광역 시·도는 기존 법정 부단체장 외에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부단체장 1명(500만 이상 2명)을 더 둘 수 있다. 부단체장을 의원 내각제 형태로도 선택 가능하다. ‘자치조직권’도 강화해서 지자체에 실·국 몇 개 두고, 사무관을 어떻게 두고 하는 식의 제약도 완화된다. 주민참여를 확대키 위해 ‘주민조례발안제’도 도입하고, 주민감사·주민소송·주민투표·주민소환 청구요건도 제한적이나마 완화된다.
지자체의 주요 결정사항은 조례가 아니더라도 모두 주민투표 대상이 된다. 지방의회의 사무처 직원 임용 등 인사의 독립성도 보장되고 정책보좌관제도 도입된다. ‘2할 자치’를 벗어나는 수준이긴 하지만, 지방소비세율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지방재정을 확충하겠다는 재정분권 추진방안도 눈에 띈다. 행안부는 이러한 개정안을 지난달 22일 입법예고했고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12월 중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일단 분권형 개헌이 좌절된 상황에서 30년 만에 지방자치법 개정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 나름대로 진일보한 내용을 담으려 한 노력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 전반에 흠결이 있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방은 고사 직전이라는 것이다. 주민주권 구현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는데도 이 안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했던 ‘연방제 수준의 강력한 지방분권 공화국’에 비해 권한도 이양도 크게 미흡한 수준이다.
자치조직권과 자치입법권을 포함한 자치권 확대는 물론이거니와 재정분권에 대한 실천적 의지도 깊지 않다. 지난 9월에 발표했던 ‘자치분권 종합계획’과 비교해도 분명 후퇴했다. 달리 생각하면 30년 전 어린아이 옷을 성년을 훌쩍 넘긴 청년에게 입어보라며 바지 기장만 늘려준 격이다.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말하면서 아직도 ‘지방정부’가 아닌 ‘단체’로 보는 건 아닐까 싶다.
“자기결정권 키우는 것이 주민자치”
촛불민심을 반영한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주권시대, 실질적인 지역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지방정부의 자치권은 주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았던가! 도시도 대·중·소가 있고, 농촌도, 한계마을도 존재하는데 지방정부 구성을 전국적-일률적으로 정하게 한 것은 지방자치 본질에 맞지 않다.
자치단체 형태도, 읍·면·동 주민자치회 모델도 보다 다양화되도록 ‘주민의 의사에 따라’ 선택토록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 바탕에서 주민 스스로 동네자치, 마을자치를 보다 더 정밀하게 설계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자기결정권을 키워가는 일이 주민자치며, 작은 일상부터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는 것이 지방자치”이기 때문이다.
분권과 자치를 논하면서 좋게만 바라볼 수 없는 지점도 분명 잔존한다. 본질이 왜곡된 중앙집권적 문화 속에서 시기상조론도 그러하고, 또 분권화가 곧 지방정치의 구조적 틀을 형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만들어놓고 지방정치인 들러리로, 기득권 세력에게 더 큰 힘만 부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충분히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그렇기 때문이라도 자치역량을 더 키우고, 지역적 토대도 더 강화하고, 시민들의 조직된 힘도 더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픈 분권으로 구색 맞추기에 연연하지 말고 믿고 해보면 된다. 한 번에 되는 것은 없다. 미비한 것은 계속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면 된다. 그러나 지향만큼은 제대로 해야 된다. 실질적인 권한과 획기적인 재원 이양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주권 구현’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15년 전 지방분권 로드맵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만을 바라보면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 30년 즈음에 왜 촛불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이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한국정치와 지역민주주의가 무엇을 복원하고 혁신해야 하는지 다시 회고하고 전망했으면 한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저성장·양극화에 이미 지역은 ‘사람도 떠나고 재정도 마르고’ 말 그대로 지방소멸 그 자체다. 지방이 사라지는 순간 대한민국도 사라진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매달려 더 이상 미뤄서도, 타협해서도, 변용해서도 안 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길이 지방자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