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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홍성이 낳은 세계적 소리꾼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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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홍성이 낳은 세계적 소리꾼 장사익
  • 윤진아 서울주재기자
  • 승인 2018.11.26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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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를, 내 고향을 더 사랑하려고요”

20년 전 홍성신문 창간 10주년 기념공연이 인생에서 가장 떨렸던 무대
홍성이 낳은 당대 최고 가객의 ‘행복을 뿌리는 판’
칠순 맞아 ‘자화상 七’ 펼친 소리꾼 장사익
자화상 八·九·十까지 계속 그려나가고파

▲ 소리꾼 장사익이 서울 홍지동 자택에서 홍성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촌사람’ 장사익

“1998년 홍성신문 창간 10주년 기념 초청공연이 제가 고향에서 노래한 공식 첫 무대였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떨리고, 설레고, 가슴 벅찬 공연이었죠. 제아무리 성공하고 돈과 권력을 얻었더라도 고향 가서 박수 못 받으면 말짱 헛일이잖아요.(웃음)”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을 애수 어린 소리로 펼쳐온 당대 으뜸 가객, 홍성이 낳은 세계적 소리꾼 장사익(70)을 서울 홍지동 자택에서 만났다. 50년 넘은 서울생활에도 장사익은 아직 충청도 사투리가 익숙한 ‘촌사람’이다.

“공연할 때도 ‘엄마 꽃구경 가유~’라고 하는데, 훨씬 맛이 산다고 하더라고요. 충청도 사투리만의 은근한 여운이 있잖아요. 이건지 저건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은유도 있고요. 예전에 대천에서 공연할 때 고향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시작 시간이 다 됐는데도 공연장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얼른 입장하라고 부르니 ‘하면 들어갈겨!’라며 꿈쩍도 안 해요. ‘아, 앉아계셔야 하쥬!’ 채근해도 ‘허면 들어가~’라며 세상 느긋하죠. 나도 그렇지만, 사실 우리 충청도 사람들이 어지간히 골치 아픈 사람들이에요.(웃음)”

7학년 되니 ‘본질’ 보이더라

광천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장사익은 상고 졸업 후 딸기 장수부터 카센터 직원까지 15개 직업을 전전하다 마흔여섯에 늦깎이로 노래판에 섰다. ‘소리가 잘 곰삭은 나이’에 노래를 시작해서일까. 그의 노래에는 굽이굽이 돌아온 삶의 희로애락이 짙게 묻어난다. 히트곡 ‘찔레꽃’을 시작으로 16번째 직업인 가수로서의 삶이 느지막이 꽃피었지만, 흔들린 적도 있다. 2016년 성대에 생긴 혹을 제거하기 위해 생명과도 같은 목에 칼을 댔을 때다.

“회복할 때까지 한동안 노래하지 못했을 땐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 소리꾼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생명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하면, 고쳐 쓰면 더 오래 쓸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장사익의 성대는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때 부른 장사익의 애국가는 한겨울 칼바람을 뚫고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렸다. 올해 일흔이 된 장사익은 “나이에 맞게 힘을 빼고, 기교도 빼고, 본질만 갖고 노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장사익은 “공연도 인생도 마치 거울 같다. 그게 쌓여 자화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의 희로애락 ‘詩노래’에 담다

평소 시를 즐겨 읽으며 시인의 글귀에 음 붙이길 좋아하는 장사익은 스스로를 ‘시 도둑놈’이라고 불렀다. 장사익은 그동안 시인 김춘수의 시 구절을 따와 만든 <꽃인 듯 눈물인 듯>을 비롯해 많은 시어들을 노래로 풀어냈다. 인기곡 ‘찔레꽃’이나 ‘하늘 가는 길’, ‘꿈꾸는 세상’ 등은 그가 직접 가사를 썼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시에서 빌려왔단다.

“공부가 짧아서 그런가, 가사가 잘 안 써져요.(웃음) 고맙게도 시인들이 제 마음과 똑같은 시를 많이 써 놓았더라고요. 시가 본래 노래잖아요. 입으로 1년쯤 외우다 보면 저절로 노래로 엮여요. 가사에 시를 빌리는 이유는 대중음악의 수준을 높여 보겠다는 뜻도 있어요. 외국에 우리 노래를 소개할 때 가사가 아름다우면 외국인들이 한국을 높여 보지 않겠어요?”
이번엔 윤동주의 시 ‘자화상’ 속 글귀가 마음에 콕 박혔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어? 벌써 여까지 왔네?’ 싶어 거울을 봤는데, 웬 미운 놈 하나가 보여요. 짜증이 확 나서 고개 돌리고 떠나가는데, 금세 또 그놈이 그리워지죠. 그 미운 놈이 바로 떳떳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며 살았던 나 자신이거든요. 사실 매일 거울을 보지만, 겉면만 보지 뒤편의 진정한 모습은 못 보잖아요.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이었지만, 이제 나를 더 사랑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담은 노래예요.”

▲ 세월과 인생을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내년 러시아서 첫 단독콘서트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는 소리꾼 장사익이 4년 만에 새 앨범 ‘자화상’을 들고 왔다. 11월 24~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대구(12월 2일), 부산(12월 8일), 광주(12월 15일), 대전(12월 26일), 경기 고양(12월 29일)에서 ‘자화상 七’ 전국순회공연을 연다.

내년 2월 말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돔 무지키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연다. 돔 무지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170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한·러 교류음악회가 열린 적은 있지만 이 무대를 러시아가 우리 가수 한 명에게 오롯이 내주기는 처음이다.

내년 6월에는 캐나다로 넘어가 ‘토론토 재즈 페스티벌’에도 출연한다. 장사익의 히트곡들을 현지 관현악단과 재즈 스타일로 편곡해 협연하고, 현지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음반으로도 제작할 계획이다.

“사는 게 바빠서 평소에 못 울어서 그런가, 제 노래 듣고 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바탕 울었으면 또 웃는 게 인생 아니겠어요? 제 공연이 ‘행복을 뿌리는 판’이잖아요. 다들 놀 수 있을 때 신명나게 놀게 해드려야죠.(웃음)”
 
오서산 氣 받은 소리 꾸준히 다듬어

매 공연마다 매진사례가 속출하는 막강한 티켓파워가 말해주듯, 장사익은 한국 음악계가 인정하는 대표 뮤지션이다. 꾸준히 음반을 내며 활발하게 공연한다는 건 젊은 대중가수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가수의 성음(聲音)은 천부적으로 타고날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잘 갈고 다듬어야 보석처럼 빛난다’고 단언하는 장사익은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매일 새벽 한 시간 반씩 소리로 목을 푸는 일은 지난 25년간 변함이 없다.

“어릴 때도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가서 30번씩 소리를 질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는데, 제가 워낙 음치여서 선생님 권유로 시작했죠.(웃음) 매일 산에 올라가 목청을 높인 끝에 결국 소리가 터졌는데, 오서산의 기를 받은 것 같아요.”

장사익의 고향은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이다. 삼봉농악패 장구재비였던 아버지 故장세웅 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가까이하며 자랐다.

“장안날(장이 서기 전날)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독배에서 사람들이 마차와 함께 긴 행렬을 이루며 광천읍내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어요. 인근 지역 상인들이 시끌벅적 만선의 꿈을 안고 광천으로 오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죠. 언젠가는 나도 저 배를 타고 미지의 섬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꿨던 기억이 나요.”

독배항을 지나 바다 옆에 펼쳐진 뚝길, 너른 염전, 길게 이어진 바닷길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배들, 반짝이는 수평선은 어린 장사익의 꿈을 키워준 ‘젖줄’이었다.

▲ 장사익이 홍성신문과 인터뷰 중 붓을 들고 창간 30주년 축하 휘호를 쓰고 있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고향 일조하고파

장사익의 모교인 광천중학교총동창회(회장 편기범)는 11월 25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광천의 봉사·자선단체 관계자 등 광천읍민들을 초청했다. 최고의 음향시설과 함께 장사익 공연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려는 배려이자, ‘장사익 문화사업’의 물꼬를 트는 일이기도 했다.

지난 제46차 총동문체육대회에서 편기범 회장은 장사익을 널리 알리며 지역경제도 살릴 ‘장사익 문화사업’을 제안하며 “찔레꽃 거리 등 특색 있는 명소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장사익은 “매우 감사한 일이고, 고향 발전을 위한 동창회의 고민도 가슴 깊이 공감하지만, 나는 아직 소리꾼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번성했던 광천이 속절없이 움츠러드는 게 안타깝다는 장사익은 “광천 곳곳이 50여 년 전 내가 떠나올 때 모습 그대로일 정도로 전혀 개발이 안 된 게 사실”이라며 “덕분에 아름다운 산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제가 좀 더 완성되고 고향에도 좋은 일을 더 많이 한 뒤에, 사람들과 차근차근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논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연친화적이고 문화가 흐르는 마을,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문화의 향기를 누리며 사는 고향을 저도 오랫동안 꿈꿔왔어요. 제가 더 영글고 나서 그런 따뜻한 고향 풍경에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30주년 홍성신문, 더 높이 도약하길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장사익은 붓을 들어 <강산이 세 번 바뀐 30년! 내 고향 홍성신문이 성장하여 나이를 먹습니다. 고향 말씀에 힘을 얻고 있습니다>라고 단숨에 썼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느덧 55년이 됐지만, 지금도 고향 소식은 늘 궁금해요. 그런데 30년 전부터 홍성신문이 마치 부모님과 친구들이 편지 써주는 것처럼 우리 동네 누가 장가들고, 누가 돌아가셨고, 마을 선거에 누가 나왔고 하는 대소사를 다 알려줘요. 정겹고, 고맙죠.”

장사익은 “출향인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고향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지역언론으로 자리매김한 홍성신문에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30주년이란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3’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숫자잖아요. 중학교, 고등학교도 3년씩 다니고, ‘삼세판’이라는 말도 있죠. 우리는 까짓 한 번 져도 두 번 이기면 된다고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거든요. 3이라는 고비를 넘기기 어려워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죠. 저 또한 ‘3년만 죽도록 해보자’는 마음으로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다가 가수의 꿈을 이뤘어요. 강산이 세 번 변하는 30년을 지나는 동안 홍성신문에도 얼마나 고비가 많았겠어요? 그걸 다 이겨내고 성장판으로 삼았을 테니, 이제 삼세판 중 두 번째 판에 더 큰 사명감으로 뛰어줄 거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60주년, 90주년, 100주년이 될 때까지 신뢰할 수 있는 최고의 지역언론으로서 홍성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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