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9:47 (금)
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23>/ 굴드-‘더블더블’과 함께 한 변주의 소확행
상태바
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23>/ 굴드-‘더블더블’과 함께 한 변주의 소확행
  • guest
  • 승인 2018.11.08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잘 갠 속옷 수납장 가득 쌓아 두기, 갓 구운 빵 천천히 찢어먹기, 손으로 원두 갈며 진한 커피향 느끼기, 글렌 굴드가 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듣기… 최근 젊은이들이 꼽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의 조건들이다. 행복은 오감(五感)을 통해 온다는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듯 소확행의 조건들은 한결같이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감각이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이니 현재를 즐기는 일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임을 그들은 일찌감치 간파해낸 셈이다.

커피와 굴드는 소확행 외에도 또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변주(變奏)다. 커피가 에스프레소를 토대로 수많은 메뉴를 탄생시켰듯 굴드 또한 바흐의 변주곡을 토대로 수많은 피아노 기법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굴드를 만나기 전까지 바흐의 변주곡은 불면증 치료에나 쓰이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음악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한 백작이 수면 유도용 음악을 바흐에게 의뢰했고 백작을 잠재우려 쓴 길고도 밋밋한 자장가가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인 것이다. 누구도 연주하려는 사람이 없을 만큼 평범했던 이 곡은 그러나 글렌 굴드라는 천재를 만나면서 강렬한 색채로 다시 태어난다. 기존의 피아노 연주와 달리 현악기처럼 잘게 쪼개 연주한 음은 곡에 명상적 분위기를 더했고 탱글거리는 터치와 리듬감은 음악에 서정성을 더했다. 특히 소녀의 읊조림과도 같은 나지막한 아리아는 컬트영화 <양들의 침묵>에 쓰이며 묻혀 있던 변주곡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굴드는 기이한 행보로 늘 주목을 받았다. 세 살 때 초견을, 다섯 살 때 작곡을 시작한 그는 천재적이라는 세간의 찬사와 달리 대중의 환호를 싫어했다. 손에 병균이 묻을 세라 여름에도 장갑을 끼었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에겐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다”며 내민 손을 거절했다. 감기에 걸렸다는 말 한 마디에 통화 중이던 전화를 끊었고 어릿광대 같다는 이유로 연주회를 기피했으며 피아노를 칠 때면 늘 다리에 고무가 달린 자기만의 의자를 고집했다. 게다가 건반 위로 쏟아질 듯한 독특한 자세며 피아노에 맞춰 읊조리던 잡음과도 같은 허밍이라니…

밤과 낮을 바꿔 산 그에게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변주곡의 달인답게 그는 변주된 커피를 즐겨 마셨다. 에스프레소에 설탕과 크림을 각각 두 스푼씩 넣어 만든 ‘더블더블’ 이라는 커피였다. 한국의 믹스커피만큼이나 달달한 더블더블은 캐나다 커피를 대표하는 카페 메뉴로 성장하면서 캐나다에선 꼭 마셔야 할 이색 음료가 됐다. 굴드는 정량의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이상의 커피를 마시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이유에서였다.

서른 두 살에 무대를 은퇴한 그는 고향에 칩거하며 글쓰기와 녹음으로 여생을 보냈다. 참여가 아닌 참관의 삶을 살며 소확생의 즐거움을 누구보다 빨리 실천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